• 아시아투데이 로고
[강성학 칼럼]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FDR): ‘사자와 여우’의 노련한 리더십

[강성학 칼럼]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FDR): ‘사자와 여우’의 노련한 리더십

기사승인 2024. 10. 16. 18:07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2024100301000268900015451
고려대 명예교수
"그는 무릎 꿇은 미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자신의 휠체어에서 스스로 일어섰다." 루스벨트의 전기작가들 중 한 사람인 진 에드워드 스미스(Jean Edward Smith)가 한 말이다. 그는 미국의 역사에서 휠체어에 의존한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다시 미국의 역사에서 조지 워싱턴이 미국을 창건하고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미국을 보존했다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절망적인 경제적 좌절에서 미국을 구했다. 그런 이유에서 사우스 다코다에 있는 국립공원인 러시모어 바위산에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지는 않지만 미국인들에 의한 역대 대통령의 업적평가에서 링컨과 워싱턴 다음으로 그는 늘 제3위에 올랐다. 미국의 전 역사에서 전례 없이 4번이나 대통령으로 선출된 그는 20세기의 가장 재능 있는 미국의 정치가였다. 그리하여 그에 관한 최초의 전기를 쓴 리더십에 관한 대표적인 학자인 제임스 맥그리거 번즈(James MacGregor Burns)는 마키아벨리의 표현을 빌려 루스벨트의 리더십의 특징을 "사자와 여우(a lion and a fox)"라고 불렀다.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가 1933년에 처음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으로 집권했을 때 미국인들의 3분의 1이 실업 상태에 처해 있었고, 농업은 피폐했으며, 공장들은 쉬고 있었고, 상업은 문을 닫고, 그리고 은행제도는 파산의 위기에 처했다. 미국은 남북 내전 이후 가장 심각한 미국의 위기, 즉, 최초의 절망적 경제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오히려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링컨의 위대한 두 번째 취임사에 버금가는 자신의 첫 취임사로 미국인들에게 충격요법을 썼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미국인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고 선언했다. 루스벨트의 힘찬 리더십하에서 미국연방정부가 국가의 경제적 삶에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으로, 그는 미국인들의 자신감을 부활시켰던 것이다.

루스벨트는 일생동안 살면서 한 번도 봉급에 의존하지 않았던 특권적 아들로서 허드슨 강(Hudson River)의 귀족이었지만 평민의 챔피언이 되었다. 그는 흔히 소아마비의 불행이 루스벨트를 변화시켰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종종 자기가 속하는 "귀족계급"의 배신자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는 자기의 역경을 극복함으로써 고통의 성격에 관해 통찰력을 얻었고 자신 속에서 힘의 자원을 발견했다. 소아마비를 치료하기 위해 그는 조지아주의 온천지인 웜 스프링스(Warm Springs)로 갔고 그곳에 머무는 수년 동안 농촌 빈곤의 냉혹한 현실을 목격했다. 자기의 주변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초라한 집에 살면서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영양실조 상태에 있음을 보았다. 루스벨트의 귀족적인 본능은 이에 반발했고 뉴딜(New Deal) 정책으로 결실을 이룬 경제적 아이디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1929년 대공황이 발생했을 때 뉴욕 주지사로서 그는 광범위한 구호의 노력을 조직한 유일한 행정 수반이었다. 그는 정부를 통해 작동하는 현대 사회는 자신들의 삶을 지탱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럴 수 없는 주민의 굶주림이나 비참한 빈곤도 막을 무한한 의무를 가진다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재능이 넘쳐나서 자신의 타고난 환경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운명의 사나이"라는 확신과 자기 직업에 대한 헌신은 자신의 귀족계급에 대한 충성을 훨씬 능가했다. 본능과 훈육으로 사회적 보수주의자인 그는 어느 미국인보다 더 평범한 시민들과 그들의 정부 사이의 관계를 변경시키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했다. 그래서 그는 "정부의 의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상정했다. 지금까지 정부는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부가 물질적 안녕으로 정의되는 어느 정도의 행복을 전달하는 최종적 책임을 갖는다고 간주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자연스러웠다. 그는 정치를 제외한 어느 분야에서도 특별한 재능이 없었다. 그러나 정치에서는 그를 필적한 사람이 없었다. 그의 자신감은 바로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사회 안전, 실업 보상, 주식 규제, 은행 저축에 대한 연방정부의 보장, 임금과 노동시간의 입법화, 집단적으로 협상할 노동자의 권리, 농산물 가격의 지원, 농촌에 전기공급 등은 오늘날 우리는 당연시하지만 그러나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현대의 정치는 루스벨트가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군 총사령관으로서 워싱턴과 그랜트(Grant) 전임 대통령들을 제외한다면 어느 대통령보다도 잘 준비된 인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른 제16대 우드로 윌슨 대통령 행정부에서 8년 동안 그는 해군성의 제2인자였다. 그는 군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했고 대통령의 권위를 행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39년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올 때 그는 육군의 서열을 무시하고 조지 마셜(George C. Mashall) 장군을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1940년 상황이 긴장되자 그는 야당인 공화당에 손을 뻗어 저명한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을 전쟁상(戰爭相)으로 임명했다. 루스벨트는 미국을 전시편제로 몰고 갔다. 그는 무기대여법(the Lend-Lease Act)을 통과시켜 전쟁 중인 영국에 원조를 하고, 징집제도를 재수립하고, 그리고 영국에 서반구에서 기지의 권리와 50척의 항해에 적합한 구축함을 교환했다. 1941년 11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지 얼마 후 미국은 소련에게도 무기대여법을 적용했다. 이것은 중요한 새로운 전시 동맹을 수립하는 첫 조치였다.

루스벨트는 1941년 태평양에서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행정부는 일본이 1941년에 공격할지 모른다고 인식했지만, 그러나 군부가 난공불락으로 믿고 있는 진주만을 공격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루스벨트의 전시 리더십은 링컨의 리더십을 닮았다. 1941년 8월 영국령인 캐나다 옆에 있는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앞바다에 정박한 미국의 순양함 어거스트라(Augustra) 위에서 윈스턴 처칠 영국수상과 회담을 갖고 "대서양 헌장(the Atlantic Charter)"에 서명했다. 그것은 전쟁의 목적을 선언한 것으로 모든 인민들은 자기가 살아갈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 나치 폭정의 최종적 파괴, 그리고 모든 국가들에게 안전하게 살아갈 수단을 제공하는 평화를 포함했다. 그리하여 어느 곳에서나 모든 사람들이 공포와 빈곤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으로부터 미국의 진주만이 기습공격을 받은 "불명예의 날" 바로 다음 날 그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3일 후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미국도 그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12월 29일 루스벨트는 자신의 메시지를 강화했다. 루스벨트는 "지난 2년 동안의 경험은 어떤 국가도 나치 독일을 달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누구도 호랑이를 쓰다듬어 고양이로 바꿀 수 없다"면서 미국은 "민주주의의 거대한 병기고(the arsenal of democracy)"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참전 소식을 들은 윈스턴 처칠은 이제 연합국의 승리가 보장되었다고 환호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워싱턴으로 돌아와 "2보 전진하고 1보 후퇴"라는 그의 익숙한 행동을 준비했다. 뉴펀들랜드 회담의 중요성에 관해 질문을 받은 루스벨트는 "의견교환, 그것이 전부다. 그 밖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헨리 모겐소(Henry Morgenthau) 상무장관에게 "나는 저글러(juggler)다. 나는 나의 왼손이 하고 있는 것을 결코 오른 손이 알게 하지 않는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정치술에 있어서 자신이 "사자와 동시에 여우"임을 고백했던 것이다.

미국은 1943년에 와서야 전쟁에서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참전 이래 그때까지는 처칠이 시니어 파트너처럼 행동했지만, 미군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한 1943년부터는 루스벨트가 시니어 파트너가 되었다 그리하여 루스벨트가 소련 지도자 스탈린을 개인적으로 직접 만나보고 싶어 하는 염원에 따라 3대국의 정상회담인 테헤란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루스벨트가 전쟁수행 전략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8개월 후 처칠은 처음으로 영국이 얼마나 작은 국가인가를 깨달았으며 자신의 무력함에 소름이 끼쳤다고 지적했다. 루스벨트의 전시외교는 추축국들의 패배와 법의 통치에 입각한 세계질서의 수립을 위한 길을 닦았다. 이 테헤란 회담을 시작으로 그 후 열린 1945년 얄타회담에서도 스탈린과 부딪치는 처칠을 밀어내면서 루스벨트가 주도권을 행사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과 소련의 스탈린과의 관계에서 루스벨트는 최고의 통치술을 보였다. 반면 프랑스의 지도자 샤를 드골의 취급은 변덕스러워 프랑스와 미국의 관계를 계속해서 요동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전후 유럽에서 공산주의 봉쇄에서 발생할 어려움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변화를 헤아리지 못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했을 때 군사적으로 3류 국가였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는 그가 싸운 전쟁의 최종적 승리의 영광을 목격하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루스벨트는 1945년 4월 12일 제2차 세계대전의 최종적 승리의 문턱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그가 죽었을 때 미국은 로마제국 이후의 어떤 강대국보다도 강력했다. 히틀러는 루스벨트보다 32일 늦게 권력을 장악하여 그보다 18일 후에 죽었다. 루스벨트가 없었더라면 히틀러는 전쟁에서 승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스탈린은 전쟁에서 훨씬 적게 얻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는 미국의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되기 위해 소아마비를 극복했던 것처럼 미국과 그의 이상들이 경제적 역경과 적의 침략전쟁, 그리고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했다. 그는 처칠과 같은 웅변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든가 "운명과의 만남"이나 "우리가 불명예스럽게 살 날"과 같은 감동적 구절들을 창조하면서 자기 생각의 위대한 전달자였다. 그는 절망적 미국인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차고 창조적인 입장을 제공함으로써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을 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의 길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그도 처칠처럼 자신의 정부보다 더 큰 인물이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세계는 거대한 제국을 상실한 처칠이나 이제 기억으로만 남은 스탈린의 공산 전체주의가 아니라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좋든 싫든, 미국은 세계의 중심이다. 그는 미국의 국경선을 넘어 세계사적 위대한 정치 지도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 모두의 큰 바위 얼굴이 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