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윤일현의 文香世談]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onelink.asiatoday.co.kr/kn/view.php?key=20241027010014684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10. 27. 17:34

진평왕릉 소나무
경북 경주 보문단지에 위치한 신라 26대 진평왕릉. 소나무가 그 곁을 지키고 있다.
"진평왕릉에 가 보셨나요?" 경북 경주에 다녀왔다는 사람에게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질풍노도의 젊은 한때, 삼국유사와 다른 책 한두 권을 들고 경주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첫눈에 강렬하게 끌린 유적지 중 하나가 이곳이다. 왕릉은 대개 산에 있지만, 신라 26대 진평왕릉은 보문단지 들어가는 입구 탁 트인 들판에 있다.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왕릉을 한 바퀴 돌며 나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보문들판 걷기를 좋아한다. 진평왕은 13세에 왕위에 올라 54년 동안 신라를 통치했다.

10월 어느 오후, 진평왕릉을 처음 찾던 날 손에 쥐고 갔던 책을 가방에 넣고 경주로 향했다. 왕릉 숲에 들어서니 팽나무와 소나무가 위엄을 갖춘 문지기처럼 길손을 맞아준다. 나는 중국 동진 시대의 걸출한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고개지의 시 '사시(四時)'를 좋아한다. 이 시에서 가을을 노래한 '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란 구절을 오감으로 생생하게 느끼고 싶으면 이곳 소나무를 찾는다. 비바람에 등은 굽었지만, 멋진 철갑을 두른 낙락장송의 솔가지 사이로 '휘영청 밝은 가을 달'을 보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황홀해진다. 나는 그 달을 바라보며 하모니카를 부는 것이 나만의 풍류라고 생각했다. 노거수 왕버들도 풍채가 대단하다. 우람한 둥치와 거친 수피가 세월의 풍파를 말해준다.

나무를 가로로 잘랐을 때, 색이 짙은 중심 부분은 심재라 하고, 색이 옅은 바깥쪽 부분은 변재라고 한다. 숲에는 심재는 썩었지만, 변재는 살아 새순을 틔우는 고목이 몇 그루 있다. 나무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사람과는 달리 추하지 않다. 그들은 "봐라, 이렇게 속 다 썩어 문드러져도 나는 껍데기로 물을 빨아들여 꽃보다 예쁜 잎새를 키운다"고 말한다. 나는 그 강인한 생명력에 옷깃을 여미며, 현재의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살아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곤 한다.


잎새를 키우는 고목
속이 문드러져도 잎새를 키우는 고목
돌로 쌓은 작은 수로(水路) 곁에는 쉬나무가 있다. 회화나무와 함께 선비들 집에 심었다는 나무다. 쉬나무는 수형이 아름답지만, 속설에 의하면 쉬할 때의 역한 냄새가 나서 쉬나무라 불렀고 주로 집 뒤편에 심었다고 한다. 쉬나무 꽃은 꿀이 많아 벌과 양봉업자들이 좋아한다. 열매는 가을에 붉게 익는다. 타원형의 새까만 씨앗은 선비가 책을 읽을 때 켜는 호롱불에 쓸 기름을 제공해 준다. 쉬나무 기름은 그을음이 거의 생기지 않고 불빛이 밝고 깨끗하다.
왕성한 생명력을 뽐내는 나무들 사이에 고사목이 몇 그루 있다. 예로부터 온갖 풍상을 견뎌낸 고목은 죽었다고 함부로 싹둑 잘라내지 말라고 했다. 나무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수명을 다해 수피가 벗겨지고 탈색돼도 여전히 다양한 생명체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고사목이 오래 발길을 붙잡는다. 숲에 잠겨 있다가 눈을 들어 들판을 바라보면 멀리 가까이 있는 낭산, 명활산, 선도산이 왕릉의 원근 풍경을 완성한다. 낭산에는 진평왕의 딸 선덕여왕이 들판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를 바라보며 누워있다.

왕릉을 나와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 지주와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둘러보며 보문들판을 걷는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축제가 끝난 광장처럼 허전하다. 황복사지는 신라 국사 의상대사가 출가한 절이고 아직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한참 걷다가 논두렁에 앉아 갖고 온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쓴 소설 '말테의 수기'를 펼쳐본다. 빛바랜 붉은 표지, 누렇게 변색한 종이, '보문각'에서 1960년에 찍은 초판이다. 나는 이 책을 고교 시절 헌책방에서 샀다.

스물여덟 살의 무명 시인 말테는 절망의 고향을 떠나 낯선 대도시 파리로 온다. 천애의 고아인 그가 가진 것은 트렁크 하나밖에 없다. 그는 연인도 아는 사람도 없이 고독과 싸우면서 거리의 풍경을 바라본다. 눈에 띄는 것은 처참한 인생과 패잔의 풍경뿐이다. 다시 봐도 첫 문장이 너무나 인상적이다.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이 도시로 모여드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여기서는 모두가 죽어버린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는 고독과 싸우면서도 허무나 절망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삶과 죽음, 사랑과 신의 존재를 서로 연결하는 궁극의 길을 추구했다. 그는 죽음을 삶의 주춧돌로 받아들였다. 릴케는 "이 작품을 쓰고 나서 죽어도 좋다"고 했을 정도로 악을 쓰며 글을 썼다.

무명 시절 릴케는 잠시 조각가 로댕의 비서를 한 적이 있다. 로댕은 릴케를 혹사했다. 하루에도 여러 통의 편지를 쓰게 했다. 성미가 고약한 로댕은 릴케를 함부로 부려 먹다가 해고했다. 그때 아내에게 쓴 편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여보 난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게 없소. 달랑 강아지 한 마리와 책 몇 권이 다요. 장미 한 송이 살 돈이 없소" 나는 "장미 한 송이 살 돈이 없소"라는 구절에서 숨이 턱 막혔다. 보통 사람 같으면 "여보, 내겐 라면 한 봉지 살 돈도 없소."라고 썼을 것이다. 무명의 시인일지라도 위대한 영혼은 씨앗부터 다르다. 그는 고독이 존재의 뿌리가 될 때까지 삶과 가난, 죽음의 의미를 묻고 또 물었다.

젊은 날 밑줄 쳤던 문장들을 다시 읽는 동안 어느덧 짧은 가을 해가 서산으로 넘어갔다. 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잠시도 손가락을 가만두지 못하면서 외롭고 쓸쓸하다는 사람이 많다. 현대인은 여백의 시간을 갈망하면서도 막상 기회가 생기면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그대,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빈 들녘을 걸으며 '말테의 수기'나 릴케의 시 한 구절을 진액이 나오도록 씹어보라. 권태와 고독, 슬픔과 비애, 허무와 절망이 삶과 창조의 토대임을 깨달을 때까지 걷고 또 걸어보라.

윤일현(시인·교육평론가)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