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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기자의 스포츠人] “첫 태극마크 달고 기뻐서 울고, 슬퍼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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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선임 기자

승인 : 2024. 12. 12. 16:21

이태호 강동대 축구부 감독
전성기엔 '한국의 게르트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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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게르트 뮐러 이태호/ 사진제공=전형찬
축구의 생명은 골이다. 대부분의 골은 발로, 그리고 헤드업으로 만든다. 그런데 0.1%의 골은 다르다. 무릎으로, 어깨로, 허벅지로 말하자면 온 몸으로 만든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골잡이로서의 감각을 타고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득점이다. 한국의 '게르트 뮐러' 이태호(63)가 그런 선수였다.

- 근황은.

"프로축구는 2002년 대전 시티즌 감독에서 물러난 것이 마지막이다. 이후 몇 군데 팀을 맡았고 2017년부터 충북 음성에 있는 강동대 축구부에서 일하고 있다. 창단 감독이자 스포츠건강관리학과 교수다."

- 어떻게 축구를 시작했나.

"대전이 고향으로, 4남 1녀 중 막내였다. 어려서 매일 골목에서 동네 축구를 했다. 특별 활동 시간에 축구를 많이 했는데, 선생님이 '태호는 축구하면 잘하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5학년 때 축구부에 들어갔다."

- 롤모델은 누구였나.

"1971년부터 시작한 박스컵(박대통령컵) 국제축구대회가 제 꿈의 무대였다. 김정남, 이회택 같은 분들의 플레이를 TV로 보면서 나중에 커서 꼭 국가대표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 가장 좋아한 선수는.

"1986년 월드컵 감독 하셨던 김정남 선생님이다."

- 이유는.

"제가 빠르거나 신체 조건이 좋은 선수가 아니지 않나. 그래서 김정남 선생님의 지능적인 플레이를 보고 완전히 반했다."

- 대전상고 때 맹활약으로 1978년 청소년 대표에 뽑혔다.

"제 첫 태극마크였다."

- 그때 기뻐서 울고 슬퍼서 울었다고 들었다.

"부모님 생각이 나서다. 고등학교 1학년 10월에 아버지, 11월에 어머니가 잇따라 돌아가셨다. 부모님은 안 계시지만 뉴스를 보고 형님 누나들이 정말 좋아하셨다. 같이 붙들고 많이 울었다."

- 1978년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대회는 남북대결 승리로 유명하다.

"준결승이었다. 0-0으로 비기고 승부차기에서 6-5로 이겼다. 냉전 시대여서 남북 대결의 중압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 경기 비디오 테이프가 있어서 지금도 가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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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대표 시절의 이태호./ 사진제공=이태호

- 당시 멤버는.

"주장이 한양대 2학년이던 박항서 선배였다. 정해원, 장외룡, 김석원, 이상용, 이길룡 등이 주전이었다."

- 경기는 많이 밀렸다.

"우리 선수들은 규정을 지켜 18~19세였는데 북한 선수들은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연장전까지 120분 동안 저쪽 찬스가 훨씬 더 많았다. 우리 실점 위기도 여러 차례였다."

- 승부차기 6번 키커였다.

"원래는 제가 1번 키커였다. 경기 중에도 페널티킥을 얻으면 제가 차는 거였다. 그런데 경기 전날 페널티킥 연습을 하는데 제 킥을 박영수 골키퍼가 다 막았다. 제 장기는 약간 대각선으로 뛰면서 골키퍼 오른쪽으로 강슛할 듯 하다가 왼쪽으로 정확하게 툭 밀어넣는 거였는데 패턴이 읽힌 거다. 김찬기 감독님이 불안했는지 승부차기 명단에서 저를 뺐다."

- 승부차기를 TV 중계로 마음 졸이며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크리켓 경기장이라 경기장이 넓어서 예선 때는 반으로 갈라 두 경기를 동시에 치르기도 했다. 그날은 10만 관중이 꽉 찼다. 북한 선수들은 5명이 다 깨끗하게 성공시켰는데 우리는 좀 위태위태했다. 다 넣기는 했지만 골키퍼 손에 맞고 들어가고 골대 맞고 들어가고 행운이 따랐다. 1번 키커가 박항서 형이었다."

- 6번째 키커는 자원한 결과인가.

"긴장헤서 다들 주저하길래 할 수 없이 제가 나갔다. 북한 나봉기 선수의 킥을 우리 박영수 골키퍼가 잘 막았다. 킥이 좋았는데, 골키퍼 오른쪽으로 비호같이 다이빙해서 멋지게 쳐냈다. 다음에 제가 골을 넣어서 이겼다."

- 박영수 키퍼보다 이태호 선수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진짜 영웅은 박영수 골키퍼인데 제 득점이 마지막 순간이라 방송에 더 많이 나왔다. 선수단 전원이 다 영웅이다."

- 북한 선수들 반응은.

"고개 푹 숙이고 초상집 같았다. 선수단 버스를 탈 때 나봉기 선수가 한쪽 손으로 다른 쪽 손을 가리고 몰래 손을 흔들어 줬다."

- 대학은 고려대로 갔다.

"제 스타일은 공을 예쁘게 차는 연세대가 더 잘 맞았는데, 대전상고 선배들이 연세대로 진학 후 운동을 그만 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오근영 감독님이 연세대 출신임에도 고려대 진학을 권했다."

- 1979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대회(U-20 월드컵)에 참가했다. 한국 선수 최초로 이 대회에서 골을 넣었지만 아쉽게 조별리그 탈락했다.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끌고 세계적인 스타로 등극한 대회다.

"1978년 아시아 청소년대회에서 북한을 이기고 이라크와 공동 우승해서 출전권을 얻었다. 파라과이, 포르투갈, 캐나다와 같은 조였고 1승 1무 1패로 예선 탈락했다."

- 뭐가 문제였나.

"상대 팀 정보가 없었고, 고베 경기장 잔디도 융단처럼 좋아서 우리 플레이를 못했다. 파라과이에게 0-3으로 지고 캐나다는 제 득점으로 1-0 승리, 포르투갈과는 0-0으로 비겼다."

- 파라과이에는 100미터를 10초 대에 뛰는 로메로 선수가 있었다.

"훌륭한 선수였던 건 맞지만, 우리가 지나치게 긴장해서 실력 발휘를 다 못했다."

- 1980년에 아시안컵 때 국가대표로 뽑혔다. 준결승에서 북한에게 2-1로 이긴 경기가 유명하다.

"동기 고(故) 정해원이 10분 남기고 2골을 넣어 국민적 영웅이 됐다. 19살 막내여서 경기엔 거의 못 나갔다. 당시 대표팀 미드필더에는 조광래, 이영무, 박상인 같은 쟁쟁한 선배들이 있었다. 축구 생활 최초의 후보 생활이라 조금 우울했다."

- 이듬해 1981년에는 쿠웨이트에서 열린 스페인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했다. 쿠웨이트에게 0-2로 졌다.

"생애 가장 억울한 경기다. 코너킥에서 이태엽 선배가 넣은 우리 동점골을 심판이 노골이라고 했다. 항의하니까 오프사이드라더라. 코너킥에 오프사이드가 어디 있냐고 했더니 골키퍼 차징이라고 그랬다. 쿠웨이트 골키퍼와는 아예 접촉이 없었는데 그런 판정을 했다."

- 그래서 퇴장 당했나.

"축구하면서 퇴장은 그때 처음 당했다. 스코어가 0-2로 벌어지고 화가 많이 났는데 쿠웨이트의 교체 선수가 들어오면서 제 발을 밟더라. 바로 머리로 받았더니 빨간 카드를 꺼내더라. 울면서 나왔다."

- 1983년 대학 졸업하면서 바로 대우에 입단했다. 프로축구 원년이다.

"저와 연세대 정해원에게 대우에서 대학 4학년 때부터 한 달에 30만원씩 장학금을 줬다. 슈퍼리그라고, 대우, 할렐루야, 유공, 포항제철, 국민은행 등 5개 팀이 매주 지방 도시를 돌아다니며 유랑극단 식으로 경기했다. 토요일 게임 뛰고, 그 다음날 일요일에 또 게임 뛰었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매 경기 관중석이 만원이라 재미있게 공을 찼다."

- 1983년 여름 LA 올림픽 예선 때 5명의 고참 선수(이태호, 최순호, 박경훈, 정해원, 최인영)가 태릉선수촌을 무단 이탈했다. 기사가 크게 났다.

"그때 제가 주장이었다. 83년 세계 청소년 4강 멤버를 중용하고 고참을 제쳐놓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후배들 다독이고 감독님하고도 대화로 풀었어야 했는데 제가 어렸다. 다만 박종환 감독님도 워낙 자기 색깔이 강해서 고참 선수 의견을 잘 받아주실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 자격 정지 3년 징계를 받았다.

"많이 힘들었다. 다행히 징계가 풀려서 싱가포르에서 열린 1984년 LA 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에 나갔다. 사우디한테 2-0으로 앞서다 4-5로 졌고, 이라크와의 3/4위전도 0-1로 져서 탈락했다. 두 경기 중 한 경기만 이겼으면 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20년만의 본선 진출이었다."

- 당시는 중동 산유국들의 로비가 만연했던 때다.

"오일머니 로비 소문이 경기 전부터 파다했다. 우리가 이기기 힘든 상황이었다."

- 1984년에 포지션을 미드필더에서 포워드로 바꾸었다.

"편도선염으로 병원에 있었는데 현대와의 경기에 출전하라고 했다. 감독님이 체력 부담을 줄여주겠으니 최전방으로 나가라시더라. 그 경기 제 골로 1-0으로 이겼다. 그해에 12골인가 넣고 우승까지 했다."

- 가장 기억나는 골은.

"1986년 월드컵 최종 예선 한일전 득점이다. 1985년 말이었고, 고(故) 정용환과 제 골로 2-1로 이겼다."

- 지금도 올드팬들은 잊지 못할 것이다.

"최순호 선수가 일본 수비진 사이로 땅볼 패스를 깔아줬다. 골문 앞에서 볼을 잡아놓고 짧은 순간에 어느 쪽으로 차야 하나 고민했다. 골키퍼 동작을 보고 반대편으로 슛했는데, 거의 굴러들어가다시피 했다. 당시 사진을 보면 킥 이후 제 자세가 꼬여 있다. 막판에 다시 킥 방향을 바꿔서 그렇다."

- 그런데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서는 출전하지 못했다.

"본선 때 차범근 선배님이 오면서 제가 밀렸다. 그런 대선수에게 밀린 것은 큰 영광이다. 공격진에는 차범근, 최순호, 김종부, 양쪽 윙에는 변병주, 김주성, 미드필드에는 주장 박창선 선배와 조광래, 허정무 등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다."

- 월드컵 본선 출전 기록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벨기에 전 교체 출전이 전부다."

- 1986년 10월에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했다.

"월드컵에 참가하면 그 자체로 실력이 는다. 중국 전에서 1골, 준결승 인도네시아 전 때도 1골 넣었다. 결승전 사우디 전은 조광래, 변병주의 골로 2-0으로 이겼는데,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우승 선배들이 '이번에 우승하면 연금 탄다'며 가벼우면서도 무겁게(?) 압력을 행사했다."

- 1987년 프로축구 개막전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 포항의 남기영 선수와 볼 경합 중 한쪽 눈을 실명했다.

"1987년 4월 4일이다. 대구에서 포항과 경기할 때였다. 날도 추웠고 경기장 바닥도 울퉁불퉁했다. 지금처럼 잔디가 좋았으면 안 다쳤을 거다."

- 무슨 뜻인가.

"나를 마크하던 포항 수비 남기영이 좀 터프한 선수다. 전반 20분쯤 하프라인에서 경합하는데 잔디가 안 좋으니까 볼이 붕 떴다. 나는 헤딩하려고 눈을 뜬채로 위로 숫구쳤고 남기영 선수가 오버헤드킥을 하려다 내 오른쪽 눈을 차버렸다. 맞는 순간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거의 기절했다."

- 심각하다는 걸 바로 알았나.

"물론이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데 눈 안에서 뭐가 막 탁탁 터지는 느낌이었다. 축구 못하면 어떻게 하나, 그 생각만 들었다.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가서 두 달 동안 치료받았다. 시신경을 다쳐서 수술도 안되고, 렌즈도 못낀다고 했다."

- 후반기에 복귀했다.

"겨우 다시 연습하는데 오른쪽 눈이 제대로 안 보였다.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보였다. 7월에 후반기 개막 경기를 고향 대전에서 했는데 3골을 넣었다. 다음날 '외눈 골잡이'라는 신문 기사가 났다."

- 지금은 어떤가.

"지금까지도 한쪽 눈이 잘 안보인다. 그래서 힘들기는 하다. 6개월마다 병원에 가서 정기 검진하고, 약 먹고, 그렇게 살고 있다."

- 남기영 선수는 사과했나.

"울면서 사과도 하고, 병문안도 자주 왔다. 경기 도중 일어난 일인데 뭘 어쩌겠나.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 미안해 하길래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1987~1988년에는 대표팀에서도 같이 뛰었다. 지금은 OB 축구 모임에서 가끔 본다."

- 2001년 대전 시티즌 감독으로 FA컵 우승을 했다. 우승 주역이었던 김은중 선수도 한쪽 눈을 다친 사실이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우승할 전력은 아니었는데, 겨우 겨우 이기면서 결승까지 갔다. 결승전 상대 포항한테는 그때 처음 이긴 거다. FA컵 대회 도중에 KBS에서 다큐멘터리 촬영을 나와서 김은중의 실명 사실이 선수들에게 알려졌다."

- 그전에는 몰랐나.

"전혀 몰랐다."

- 그것이 우승에 동기부여가 됐나.

"물론이다. 또 하나, 결승전 중간에 우리팀 에이스인 골키퍼 최은성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선수들한테 더 확실한 동기부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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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FA컵 우승 감독 이태호가 상암운동장에서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사진제공=대전 하나 FC
- 김은중 감독과는 지금도 연락하나.

"물론이다. 나는 오른쪽 눈을 다치고 은중이는 왼쪽을 다쳤다. 그래서 서로 각별한 감정이 있다."

- 김은중 감독과는 그밖에도 개인적 인연이 각별하다고 들었다.

"신부 쪽이 교육자 집안인데 결혼을 조금 꺼린다는 말을 듣고는 제가 직접 그쪽 어른들을 만나서 설득했다. 장래가 유망하고 인성도 참 좋은 아이라고 했다. 결국 결혼에 골인해서 잘살고 있고, 청소년 세계4강 감독, 프로 감독으로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어서 마음이 뿌듯하다."

- 강동대 감독으로서의 소감은.

"좋은 성적을 내면 좋겠지만 쉽지 않고, 우리 제자들이 축구계에서 좋은 진로를 찾아갈 수 있도록 힘껏 도울 생각이다. 힘든 여건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훈련하는 제자들을 보며 저도 많이 배우고 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1989년 5월 5일 한일전이다. 후반까지 0-0으로 가니까 한쪽 관중석에서 '이태호! 이태호!'라며 팬들이 소리를 질렀다. 나중에 운동장 전체가 '이태호! 이태호!'를 외쳤다. 그래서 출전했는데 최순호 어시스트로 제가 결승골을 넣고 1-0으로 이겼다."

▲ 이태호는 대전 자양초, 대전동중, 대전상고(현 우송고), 고려대를 졸업했다. 1978년 청소년 대표로 뽑혀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고, 대표팀으로는 80경기 출전에 24골을 넣었다. 프로축구는 대우 로열즈(1983~1992) 원클럽맨이다. 감독으로는 동의대(1995~1998), 대전 시티즌(2001~2002), 신한고(2004~2007), 동의대(2007~2010), 네팔 MMC(2011), 대만 국가대표팀(2011~2012), 부산 카파 풋살단(2014~2015)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2015년부터 음성 강동대 축구부 감독이자 스포츠건강관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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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 강동대 감독(오른쪽)과 장원재 선임기자./ 사진제공=전형찬
장원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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