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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코이스트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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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2. 07. 0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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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지난 학기, 학생들과 상담하다가 ‘에코이스트’란 말이 널리 회자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궁금증에 자료를 찾아보았다. 얼핏 생각하기에 에코이스트란 말이 오래된 개념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새로운 세대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용어였다. 그 특징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대략 주목받기 싫어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피하며,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성격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속성은 특히 MZ세대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에코이스트는 자신만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나르시시스트와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면서도 동시에 그와 동일한 궤적에서 원점을 공유하는 ‘자기방어’기제쯤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보통 이기심과 정반대에 있는 이타심의 경우에도 심리적인 보상과정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자기애를 확인하게 된다. 남을 돕는 행위 역시 궁극에는 자신의 마음에 충만함으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여하튼 처음에는 에코이스트란 말의 뉘앙스가 매우 긍정적이었으며 어느 정도 공감이 되기도 하였다.

문제는 이렇게 성격유형을 규정하는 것이 특정한 프레임으로 청년세대를 구속한다는 점에 있다. 어쩌면 내가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혹은 어떤 직업군에 맞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겐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불안을 미끼로 자신이 맞이할 내일을 한계 짓는 잣대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은 범주에 갇혀 있다. 태어나서 이름조차도 자신이 짓지 않았다. 성별도 선택할 수 없었다. 성장환경도 의지와는 무관하다. 국적도, 타고난 외모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피상적인 것들에 갇혀 내적 영역의 잠재력에 대해선 간과하기 일쑤다. 단순한 호르몬의 수치로 나의 성징을 일반화하기에는 너무도 다양한 역동성이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친다. 한 사람이 몰(歿)하면 하나의 우주가 멸(滅)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이 우주라고 한다면 우리는 딱히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카오스적 존재라는 사실을 각성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혼돈을 뚫고 무궁한 가능성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에코이스트로 돌아가 보자. 우선 먼저 누가 작금의 청춘들을 MZ세대라고 불렀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실체도 없는 호명에 왜 부응해야 하는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MZ세대를 아우르는 에코이스트란 말에는 은근히 우리에게 능력주의를 내면화하는 코드가 숨겨져 있다. 자신의 일신에 대해 질문의 대상으로서 주목받고 싶지 않다는 말 역시 자기를 스펙으로 규정하지 말라는 자기방어가 작동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한편 성공한 이도 시기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작용했을 것이다. 양가적인 방식으로 전자와 후자의 이해를 모두 충족하고 있다.

한편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반대로 나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신호다. 앞서 제시한 질시를 피하고자 하는 승자의 논리와도 중첩되는 부분이다. 성공과 비성공이라는 구별 짓기 게임에 신의 한 수와도 같은 안전핀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엄격하다는 윤리 또한 자본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모든 것이 나의 책임이라는 전가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는 지점이다.

그런데 더욱 문제되는 것은 뇌관을 빤히 드러내고도 당당하다는 데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분열과 갈등의 프레임이 아무런 완충장치 없이 폭주한다. 세대를 규정하는 모든 잣대는 프레임에 불과하다.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능력주의자들이 만든 그런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 된다. 세대론과 젠더갈등 등 이 시대를 관통하는 우리들을 옭매는 모든 ‘딱지들’을 거부해야 한다. 갈등의 딱지치기를 조장하는 오일남과 프론트맨, 바로 그들이 누구인지 직시해야 한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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