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이영조 박사의 정치경제 까톡] 민중주의의 파탄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onelink.asiatoday.co.kr/kn/view.php?key=20241105010002196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11. 05. 17:56

이영조
이영조 전 한국라틴아메리카학회 회장
◇세 가지 숙제와 민중주의 정치경제

193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경제는 서로 연관된 세 가지 숙제와 씨름해 왔다. 첫째는 한계가 드러난 1차 산품 수출경제를 대신할 새로운 역동적인 경제발전모델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둘째는 막 시작된 산업화의 과정에서 자라난 새로운 사회세력, 특히 조직노동에 대해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셋째는 이러한 두 가지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정치체제 내지는 정치연합을 형성하는 일이었다.

아무튼 파탄한 수출경제체제가 경제의 대외개방과 자유방임을 결합한 것이었던 만큼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1930년대 이후 민족주의적인 국가주도의 성장전략이 등장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했다. 조직노동에 대해서는 정치과정에의 편입 여부와 편입의 방식이 문제가 되었다. 정치적 편입은 경제적 양보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단순히 정치적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경제적 양보와 소비요구의 충족은 투자에 쓰일 잉여를 축소시킬 우려가 있었다. 과두세력을 대체한 민중주의연합의 선택은 조직노동의 편입과 동원이었다. 민중주의연합은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수단이 된 것이 수입대체산업화였다.

◇한계에 이른 수입대체산업화
라틴아메리카의 수입대체산업화는 처음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다. 선진국들이 전쟁에 휘말려 라틴아메리카가 필요로 하는 공산품을 공급할 수 없게 되자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비교적 단순한 수입 공산품을 국내에서 생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정부가 나서서 본격적으로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라울 프레비쉬 같은 경제학자들이 라틴아메리카의 왜곡된 산업구조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발전모델로 수입대체산업화를 권고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수입대체산업화만이 민중주의체제에서 요구되는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할 수 전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입대체산업화는 처음 얼마 동안은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할 뿐 아니라 대외적 취약성도 극복하는 묘책처럼 보였다. 보호된 국내시장에서 외국제품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던 기업가들은 비교적 높은 임금을 지불하면서도 일정한 수준의 이윤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수입품과의 경쟁을 차단한 결과 국제경쟁력이 없는 비효율적인 기업들이 양산되면서 경제는 점차 활력을 잃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수입대체가 점차 고도화되면서 중간재와 자본재의 수입이 급증하고 있었다. 수입의 필요를 줄임으로써 대외적 취약성을 극복하려던 수입대체산업화가 오히려 대외적 취약성을 증가시키는 역설적인 결과를 빚었다.

일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수입대체산업화전략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발전전략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앨버트 허쉬먼(Albert Hirschman)이 잘 지적하듯이, 수입대체산업화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후발국의 경우 수입대체도 분명 필요하다. 라틴아메리카 수입대체산업화의 문제는, 수출경제의 극단적 대외개방과 시장방임의 반작용으로, 지나친 국내시장 보호와 국가개입으로 갔다는 점이다. 동아시아가 전후의 개방적 무역질서를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을 때 라틴아메리카는 고립주의적 정책을 고집했다. 단적인 예로 멕시코의 경우 1986년에야 그것도 외채위기 이후 외채연장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IMF와 채권단의 압력 때문에 마지못해 WTO에 가입했다. 그만큼 외부와 담을 쌓고 내부지향적 발전전략을 추구했다는 이야기이다.

◇민중주의의 파탄: 재정적자와 살인적 인플레이션

수입대체산업화가 한계에 이른 것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재정적자의 급증과 이로 인한 인한 초(超)인플레이션이었다. 이것은 민중주의정권이 필연적으로 '타협국가(estado de compromisso)'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데서 기인했다. 수출경제 시기 정권을 독점했던 농촌과두세력은 수출경제의 붕괴로 약화되긴 했어도 여전히 강력한 경제력과 지방정치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항하는 민중주의연합은 당연히 도시의 주요 세력을 모두 포괄하는 다계급연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 과두세력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농민은 연합에서 배제했다. 결국 민중주의연합은 농민을 제외한 사회의 모든 주요한 세력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다양한 세력을 결합하는 시멘트 역할을 한 것이 국가가 각 세력에 제공한 각종 시혜였다.

민중주의연합을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는 처음부터 사회 주요세력의 분배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발전 수준을 능가하는 복지프로그램이 도입되었고 기업가에는 투자자금을, 중산층에게는 정부와 공기업의 한직을 제공해야 했다. 문제는 국가의 시혜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고 같은 수준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도 기존의 시혜를 늘리거나 아니면 새로운 시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 결과 국가의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 재정적자는 주로 새로운 통화의 발행으로 충당되었다. 민중주의 말기에 시작된 초인플레이션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경제의 불확실성이 증가하면서 투자는 위축되고 따라서 성장도 눈에 띄게 둔화했다. 당연히 구조조정이 요구되었지만 민중주의하에서 규모와 영향력이 증가한 조직노동의 반대로 사실상 불가능했다. 경제정책이 표류하면서 정치적 혼란도 증가했다. 결국 민중주의정권은 군사쿠데타로 전복되었다.

이영조 (전 한국라틴아메리카학회 회장)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