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만의 귀환, 루이스 부르주아가 호암미술관에 펼친 내면 풍경 106점 작품으로 보는 70년 창작 여정... '의식과 무의식' 이중 구조로 연출
루이즈 부르주아, 사진_낸다 랜프랭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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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뉴욕 자택에서 루이스 부르주아. 사진=낸다 랜프랭코 ⓒ The Easton Foundation / Licensed by SACK, Korea
용인 호암미술관 전시장 한 구석에 거대한 청동 거미가 웅크리고 있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갈색 거미는 당장이라도 관람객을 향해 다가올 듯 긴장감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 무시무시해 보이는 거미는 다름 아닌 작가의 '어머니'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의 개인전 '덧없고 영원한'이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내에서 25년 만에 선보이는 대규모 회고전으로, 1940년대 초기 회화부터 말년의 패브릭 작업까지 총 106점의 작품을 통해 작가의 전 생애를 조망한다.
파리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활동한 부르주아의 작품 세계는 한 마디로 '심리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도로 받은 깊은 상처, 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감정, 그리고 33년간 받은 정신분석 치료의 기록들이 모두 그의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다.
아버지의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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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부르주아의 '아버지의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Father). ⓒ The Easton Foundation / Licensed by SACK, Korea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은 1974년작 '아버지의 파괴'다. 강렬한 붉은 조명이 비치는 유리관 안, 식탁 위에 놓인 고깃덩어리는 작가가 어린 시절 품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복수 욕망을 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어린 시절 식탁에서 아버지를 끌어내려 사지를 찢어 먹어 치우는 상상을 했다"는 작가의 고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르주아에게 어머니는 모순적 존재였다. 태피스트리 복원가였던 어머니는 평생 실과 씨름하며 살았고, 작가는 그런 어머니를 실로 집을 짓는 거미에 비유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는 자신을 보호해준 존재이자 경쟁과 질투의 대상, 그리고 자신을 버린 존재이기도 했다.
루이즈 부르주아 〈엄마〉(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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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부르주아의 청동 조각 '엄마'(Maman). /삼성문화재단
이번 전시의 독특함은 공간 연출에 있다. 1층은 밝은 조명의 '의식' 영역으로 이성과 질서를 상징하며, 2층은 어두운 '무의식' 영역으로 취약함과 우울, 공격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관람객은 마치 작가의 내면을 탐험하듯 두 공간을 오가며 부르주아의 복합적 심리 구조를 체험하게 된다.
전시장 곳곳에는 부르주아가 남긴 글귀들이 불어 원문과 한국어 번역으로 함께 제시된다. 개념미술 작가 제니 홀저가 선별한 부르주아의 어록은 프로젝션으로 투사되어 몰입감을 더한다.
'밀실(검은 날들)', '붉은 방(부모)' 같은 대표작들은 작가가 평생 탐구한 기억과 트라우마의 공간들이다. 특히 '붉은 방(부모)'는 문으로 둘러싸인 방 안을 문틈으로만 엿볼 수 있게 해, 마치 아이가 부모의 은밀한 순간을 훔쳐보는 듯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6. 꽃, 2009, 사진 크리스토퍼 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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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부르주아의 '꽃'. 사진=크리스토퍼 버크 ⓒ The Easton Foundation / Licensed by SACK, Korea
하지만 부르주아의 작품이 고통과 분노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다. 후기작 '토피어리 4'에서는 다리 하나가 없는 인체에서 아름다운 푸른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꺾인 나뭇가지에서도 새로운 색의 꽃이 피어난다.
이진아 리움미술관 큐레이터는 "상처받고 부러졌지만, 작품을 피워내는 작가의 모습을 상징한다"며 "부르주아의 작품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예술로 승화시킨 치유의 여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호주 시드니에서 시작해 일본 도쿄, 대만 타이페이를 거쳐 한국에 도착한 아시아 순회전의 마지막 여정이다. 뉴욕 이스턴 재단과의 협력으로 기획된 이 전시는 각 도시마다 다른 구성과 내용으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김성원 호암미술관 부관장은 "25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부르주아 전시로, 국내에서 소개된 전시 중 가장 감동적인 자리가 될 것"이라며 "작가의 대표작 '엄마'를 소장한 호암미술관에서 열리는 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1월 4일까지.
3. 붉은 방(부모), 1994, 사진 피터 발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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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부르주아의 '붉은 방(부모)'. ⓒ The Easton Foundation / Licensed by SACK,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