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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찬란한 낙관의 이면에는 섬뜩한 불안도 존재한다. 판단의 주권과 일자리를 잃고, 생각하는 주체로서 인간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진정한 유토피아를 가져올 것인가, 아니면 그저 안락함으로 포장된 또 다른 디스토피아의 문을 열 것인가. 기술 진보가 선사할 무한한 편의성 뒤에 숨겨진 '주체성 상실'이라는 대가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지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할 때다.
이 질문 앞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품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다. 이 소설은 폭력적 독재 대신 역설적으로 '행복'과 '안정'을 앞세운 사회를 그린다. 작품 속 서기 2540년의 '세계국가'에서 인간은 인공 부화장에서 생산되며, 태어나기 전부터 계급에 맞게 기계적으로 설계된다. 반복되는 최면 교육은 자신의 처지를 열렬히 사랑하게 만들고, 사회 불안을 초래할 수 있는 가족, 종교, 예술과 철학은 철저히 배제된다. 불안과 슬픔은 '소마(Soma)'라는 약물로 즉시 휘발된다. 이 사회의 최고 가치는 자유가 아니라 안정이며, 진실이 아니라 고통 없는 쾌락이다.
주인공 버나드 마르크스는 이 완벽해 보이는 질서에 끝내 섞이지 못한 채 소외감을 느끼다가,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자연의 순리대로 태어난 청년 존을 런던으로 데려온다.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가슴에 품고 자란 존에게 런던의 풍경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깊은 사유 대신 말초적인 오락에 침잠하고, 인간적인 고뇌 대신 약물로 감정을 지워버리는 삶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야만인' 존은 문명 세계의 통제자 무스타파 몬드를 향해 강요된 행복 대신 고통받을 권리와 진정한 자유를 선언하며 외친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치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진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를 원합니다." 그는 몬드와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불행해질 권리와 진실을 추구할 자유를 끝까지 요구하지만, 이미 집단의 안정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반납한 세계에서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존의 파멸은 헉슬리가 경고한 것이 물리적인 압제가 아니라, 달콤한 편안함에 길들어 스스로 사유하기를 포기한 인간의 무감각이었음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 설정은 놀라울 만큼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닮았다. 인공지능은 취향을 학습해 콘텐츠를 추천하고 소비를 설계한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지만, 사실 그 선택지는 알고리즘이 정교하게 배열한 결과일 뿐이다. 세계국가의 소마가 불안을 제거했듯, 오늘날의 무한 스크롤과 맞춤형 피드는 불편한 질문을 외면하게 만든다. 효율을 앞세운 자동화는 인간이 판단하고 책임질 영역을 축소한다. 생각할 필요 없는 삶은 편리하지만, 동시에 사유의 근육이 퇴화하는 과정이다. 인공지능이 내놓는 정답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스스로 질문하는 법을 잊고, 기계가 제시하는 경로를 유일한 진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데이터는 인간을 예측 가능한 존재로 환원한다. 개인의 성향과 패턴이 수치로 정리되고, 그 수치가 신용 점수나 채용 필터링처럼 우리의 기회와 가치를 규정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인간의 계급이 미리 설계되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알고리즘적 평가 속에서 끊임없이 분류되며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수치화된 데이터가 미래를 결정하는 사회는 효율적일지 모르나, 그 과정에서 인간만이 가진 '의외성'과 '비합리적 열정'은 소거된다.
결국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도구를 통해 어떤 인간상을 구현할 것인가에 있다. 무스타파 몬드는 불행해질 권리를 제거함으로써 사회를 안정시켰다고 말하지만, 진정한 창조성과 윤리적 성숙은 대개 불안과 고통을 통과하며 자라난다. 갈등과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사회는 안전할지 모르나, 그것이 곧 인간다운 사회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고통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성장이 없는 정체이며, 결핍이 사라진 자리에는 욕망의 허무만이 감돌 뿐이다. 우리는 효율을 위해 사유의 수고를 내려놓을 것인가, 아니면 불완전하더라도 스스로 질문하고 선택하는 주체로 남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먼 미래의 어느 지점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기술을 대하는 태도에서 갈린다. 편안함에 취해 질문을 멈출 때 우리는 이미 누군가 설계한 세계에 비판 없이 순응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다움은 기술의 성취를 넘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려는 사유의 노력, 기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불편한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알고리즘 밖의 정보를 찾거나 디지털 기기와 거리를 두는 작은 행동이 필요하다.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맹목적 믿음을 거두고 인간 고유의 불완전함을 껴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기계의 부속품이 아닌 자기 삶의 주인으로 남을 수 있다. 그 선택의 기로에,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다.
/윤일현(시인·교육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