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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환 크레페 펀드 대표이사 |
2013년 3월 20일 오후 2시, 신한은행 창구 화면이 일제히 꺼졌다. 다시 켜 보아도 알 수 없는 문구만 뜰 뿐 부팅조차 되지 않았다. 같은 시각 제주은행과 농협은행의 전산망도 차례로 마비됐다. KBS와 MBC, YTN도 예외가 아니었다. '3.20 전산 대란'이다. 그해 6월 같은 공격이 다시 벌어졌고 금융기관들은 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해 국정감사에서 보고된 바로는 백신 업데이트 파일이 경로였고, 해킹당한 컴퓨터는 3만 2,000대, 복구 비용은 두 차례 공격을 합쳐 8,000억원이었다. 뼈아픈 피해였다.
◇ 튼튼하지만 불편한 담장
이 피해를 겪은 뒤 금융당국이 내놓은 것이 '망분리'다. 내부 업무망을 인터넷에서 물리적으로 떼어 놓으라는 것으로, 2015년 전자금융감독규정으로 법제화됐다. 그날 이후 한국의 은행원들은 책상 위에 컴퓨터를 두 대씩 두고 일해 왔다.
미국과 유럽의 감독 지침은 신뢰 구역과 비신뢰 구역을 나누라는 원칙만 제시하고 방법은 은행 재량에 맡긴다. 컴퓨터를 물리적으로 두 대로 쪼개는 것을 법으로 강제하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그리고 이 벽은 다소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제 몫을 하고 있다. 3.20 같은 '대란' 규모의 사고는 그 후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이 벽이 불편하다는 데 있다. 업무용 프로그램은 클라우드로 빌려 쓰는 서비스가 됐다. 보안 솔루션도, 고객관리 도구도, AI도 마찬가지다. 내부망에 AI를 구축하고 운영하는 비용은 감당하기 어려운데, 고객의 기대는 이미 높은 수준의 AI 서비스에 맞춰져 있다.
금융당국도 이를 인정한다. 2024년 8월 「금융분야 망분리 개선 로드맵」은 이 규제를 스스로 '갈라파고스 규제'라 불렀다. 더 뼈아픈 지적도 있다. 최신 보안 패치가 대부분 클라우드로 배포되는 탓에, 망분리가 오히려 실시간 대응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보안을 위해 세운 벽이 보안의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벽은 낮아지고 있다. 2026년부터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내부 업무망에서도 클라우드 소프트웨어를 쓸 수 있다.
◇ 낮아진 벽 뒤의 위험
그러나 벽을 낮추는 순간 그 대란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2024년 말 금융보안원의 모의 해킹에서는 망분리 환경 안에서도 접근 통제 서버와 인증 체계를 타고 전진해 외부와 통신 가능한 지점까지 도달하는 우회 경로가 발견됐다. 벽은 낮아지는데 그것을 대신할 것이 아직 없다.
2013년에는 AI가 없었고 클라우드 의존도도 낮았다. 만일 오늘 그때와 같은 규모의 공격이 성공한다면 손해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 그렇다면 무엇이 벽을 대신하는가
답은 '제로 트러스트'다. 2010년 미국의 보안 분석가 존 킨더바그가 '누구도 무조건 믿지 말고 언제나 검증하라'는 원칙을 내놓았고, 2020년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가 정부 표준으로 정리했다.
기존 보안이 문 하나를 튼튼히 잠그고 그 문을 통과한 것은 무엇이든 믿어 주는 방식이었다면 - 13년 전 백신 업데이트 파일이 그 믿음을 타고 들어왔다 - 제로 트러스트는 큰 문이라는 개념 자체를 버린다. 대신 모든 요청 하나하나에 검문소를 세우고 접속할 때마다 신원과 기기 상태를 다시 확인한다. 망분리가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인가'라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가른다면, 제로 트러스트는 매번 묻는다. 지금 이 사람이, 이 기기로, 이 순간에, 이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있는가.
◇ 결국 멀티에이전트만이 정답
그런데 은행 하나에서 오가는 접속은 하루 수백만 건이다. 그 모든 요청을 밀리초 단위로 확인하는 일은 사람의 속도로는 불가능하다. 검문소를 지키는 것도 결국 AI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지난 두 번 설명했던 원리가 그대로 되풀이된다. 멀티에이전트가 해답이다. 이 감시자는 하나의 거대한 AI여서는 안 된다. 접속을 판단하는 에이전트, 이상 행동을 탐지하는 에이전트, 최종 승인을 내리는 에이전트가 저마다 역할을 맡아 서로를 검증하는 팀이어야 한다. 침입자에게 조종당한 에이전트든 스스로도 모르게 잘못 판단한 에이전트든, 겉모습만으로는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판단은 매번 다시 검증되어야 하고, 각 에이전트에게는 꼭 필요한 권한만 주어져야 하며, 이 중 누군가는 이미 뚫려 있을지 모른다고 가정하고 설계되어야 한다.
실제로 2025년 12월 오픈소스 보안 표준단체 OWASP는 자율 에이전트를 위한 보안 위험 목록을 처음 발표하며 에이전트 권한의 탈취와 남용을 핵심 위험으로 짚었다.
3.20이 남긴 교훈은 틀리지 않았다. 담장을 세워야 한다는 것. 다만 담장의 형태가 달라져야 할 뿐이다. 하나의 거대한 벽 대신, 다수의 AI 에이전트가 서로를 확인하며 지키는 촘촘한 그물. 낡은 벽을 낮추는 지금이야말로 그 그물을 서둘러 짜야 할 때다.
이영환 (크레페 펀드 대표이사)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