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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발표한 작품이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 개최를 기념하는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이다. 이 작품은 파리오페라하우스 초청으로 작곡됐기 때문에 프랑스어 대본으로 먼저 공연됐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이탈리아어 대본으로 이탈리아에서도 초연됐다. 이 오페라를 살펴보면 프랑스의 그랑오페라 양식이 먼저 눈에 띄고, 베르디 특유의 리소리지멘토(통일 이탈리아운동) 오페라다운 분위기, ‘라 트라비아타’에서 선보인 혁신적인 선율, 훗날 발표될 ‘아이다’와도 같은 갈등구조 등등 베르디 오페라의 전반기와 후반기 특징이 골고루 나타난다. 이렇듯 여러 의미를 많이 가졌음에도 이 작품은 오늘날 인기 있는 레퍼토리는 아니다. 프랑스어 버전은 거의 공연되지 않고, 이탈리아어 버전이 주로 공연되지만 이마저도 다른 베르디의 명작들에 비해 자주 공연되는 것은 아니다.
이달 2~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국립오페라단의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역시 국내에서는 최초로 선보인 것이다. 창단 60주년을 맞이한 국립오페라단은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많은 한국 초연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는 중이다. 이전 작품인 오페라 ‘아틸라’를 비롯해 지난해 ‘서부의 아가씨’, 서정오페라 ‘브람스’, 초연은 아니지만 60년만의 재발굴이라 할 수 있는 ‘왕자 호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초연작들을 공연하고 있다.
이번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에서 가장 주목했던 부분은 등장인물의 캐스팅이다. 소프라노 서선영, 테너 강요셉이 나선 A팀과 김성은, 국윤종이 호흡을 맞춘 B팀 모두 빼어난 성악가들이 각자 개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는 양일 다 관람해도 좋은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3일 무대에 선 소프라노 김성은은 정통 벨칸토 스타일의 안정된 발성과 섬세한 표현력으로 엘레나의 절망을 잘 그려냈다. 이 작품은 여주인공 심경변화의 폭이 큰데다 연출이 극적인 표현을 많이 요구했기 때문에 음악적으로나 연기 측면에서 많은 연기력이 필요했는데 그는 가창과 표정 등으로 다양한 감정을 호소력 있게 전달했다.
비운의 남자주인공을 맡은 테너 국윤종 또한 드라마틱한 음색과 풍부한 성량으로 시종일관 극한의 감정을 노래해야 하는 아리고 역할을 잘 소화했다. 국윤종은 선이 굵은 발성과 강렬한 음색을 특기로 하는 테너인 만큼 혈기왕성한 아리고 역할에 잘 어울렸다. 그리고 아리고의 아버지이자 프랑스인 몽포르테 총독을 노래한 바리톤 한명원은 명료하고 따뜻한 질감의 음색을 바탕으로 권위적인 지배자보다는 되찾은 아들에 대한 부정이 깊게 느껴지는 아버지의 연민어린 모습을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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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공연의 연출은 2017년 국립오페라단에서 ‘오를란도 핀토 파초’를 연출했던 파비오 체레사였다. 그는 1282년 시칠리아의 만종사건이라는 작품의 역사적 배경을 2022년에도 유효한 보편적 비극으로 그려냈다. 오페라를 감상하는 동안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적으로 떠올랐던 것은 연출자의 그 같은 의도가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본다. 오렌지색과 하늘색이라는 보색의 대비, 장식적인 요소가 강하게 집중된 무대는 독특하고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다만 무대의 상징성이 지나치고, 주인공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릴 때마다 복면의 영혼이 등장해 시선을 분산시키거나 작품의 몰입에 방해가 되는 안무가 빈번했던 점 등은 아쉬웠던 부분이다. 베르디의 음악이 갖는 힘에 좀 더 기대고 갔으면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홍석원이 지휘한 코리아쿱오케스트라는 초반 성악부에 비해 탄력성이나 텐션이 다소 부족한 연주라는 인상을 받았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집중도가 높아지며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노이오페라합창단은 합창의 역할이 중요한 이 오페라에서 단단한 제 몫을 해냈다.
아리고와 엘레나는 두 사람의 결합으로 모든 갈등과 분쟁이 해소되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러나 오페라에서조차 그런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 작품의 진정한 비극성은 그들이 마주했던 잔혹한 광경이 오늘날에도 진행 중이라는데 있다.
/손수연 오페라 평론가·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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