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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허진호 감독은 왜 싸구려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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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10. 11.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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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이해하기 힘든 증오심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외출' 등 남녀의 사랑을 섬세하게 묘사한 허진호 감독의 감성적인 영화를 '멜로'라는 말로 낮게 평가하는 반면,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엽기적으로 묘사해 지적으로 그럴싸하게 보이는 영화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영화 팬들 사이에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관객의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는 김기덕, 박찬욱, 봉준호 등의 '수준 높은' 영화보다는, 남녀의 사랑과 그 설렘과 그 덧없음을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하게 묘사하는 허진호의 '수준 낮은' 멜로 영화를 훨씬 더 좋아한다.

수년 전 어느 학회에서 허 감독 영화의 음악을 맡아온 조성우 선생을 우연히 만났을 때, 나는 집사람과 함께 허 감독의 팬임을 밝히고, 허 감독에게 이 사실을 전해달라는 말을 하면서, 멜로를 유치하게 보는 건 잘못이란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나는 딴 데서 한국 최고의 감독은 허진호라는 말도 자주 했다. 그런데 허 감독이 남녀의 사랑을 섬세하게 묘사하던 바로 그 솜씨로 박정희 대통령을 악마로 묘사하는 정치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매우 놀랐다.

멜로 영화 감독이라 해서 정치영화에 손을 못 댈 이유는 없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허 감독의 '암살자(들)'이란 영화가 박정희 대통령이 자기 부인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하길래, 나는 감독이 허진호가 맞는지, 혹시 동명이인이 아닌지 수차 확인해야 했다.

내가 매우 놀란 것은, 박정희가 정치적 국면전환을 위해 부인까지 죽일 수도 있다는 허 감독의 상상의 밑바닥에는, 박정희에 대한 엄청난 증오심이 잠재해 있음에 틀림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증오심 말고는 그렇게 황당하게 상상할 이유를 나는 달리 찾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영화와 증오의 영화

나는 허 감독이 예전에 만든 어떤 영화에서도 인간에 대한 그런 엄청난 증오심을 본 적이 없었다.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유지태)는 벚꽃이 만개한 어느 날 은수(이영애)로부터 헤어지자는 통고를 받고도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말만 바보처럼 하고 만다. 상우는 아쉽고 허전한 표정만 지을 뿐, 은수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복수를 하겠다든가 죽이겠다는 생각 따위도 물론 없다.

상우와 은수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려나가면서 허 감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젊은 남녀의 사랑이란 아름답고 가슴 설레지만 피었다 지는 벚꽃처럼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하는 덧없는 것임을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 영화 어디에도 분노와 복수라든가 증오심 같은 건 없었다. 인간의 모든 사랑이 그렇듯 남녀의 사랑 또한 벚꽃처럼 피고 질 따름이라는 불교적 통찰이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영화 내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집사람이 '겨울연가'와 배용준의 열렬한 팬이었기에 나는 배용준 주연의 '외출'을 집사람과 함께 보았다. 이 영화에서 인수(배용준)는, 자기 부인이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같이 사망했음을 알고도, 속으로 슬픔을 삼키기만 할 뿐, 부인에 대한 분노나 증오심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부인의 외도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인수는 장례식장에서 만난 죽은 남자의 부인(손예진)과 눈이 맞아 사랑을 나누다가 쓸쓸히 헤어지고 만다. 상처받은 사람들끼리의 이 불륜 또한 내게는 사랑의 덧없음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가슴 아픈 징표로 읽혔다.

그렇다면 '암살자(들)'에서 허 감독이 보여주는 박정희에 대한 엄청난 증오심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정치판이 사랑판과 다르다 해도 둘 다 덧없는 세상사일 뿐이다. 인간의 사랑이 덧없다면 정치 또한 덧없어야 한다. 우파도 덧없고 좌파도 덧없다. 좌우파의 대립과 갈등도 물론 덧없다. 정치가 덧없는 줄 안다면 어떤 정치인을 그토록 증오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싸구려 이데올로기의 노예

수백만의 유태인을 가스실에 넣어 학살한 히틀러도, 수천만의 러시아인을 백주대낮에 때려죽인 스탈린도 자기 부인을 죽이려 하지는 않았다. 박정희가 자기 부인을 죽였을지 모른다는 허 감독의 상상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박정희가 히틀러나 스탈린보다 더 나쁜 악마임을 전제해야 한다. 과연 이 전제가 성립할 수 있을까. 김일성도 아니고 박정희가 수백 수천만을 죽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남녀가 아무리 사랑을 해도 기아선상에서는 그 사랑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최소한 밥은 먹고 살아야 연애가 가능하다. 기아선상에서는 어떤 멜로도 아름답기가 어려울 듯하다. 이 점을 생각해 보면 박정희를 악마로 보더라도 이 나라를 기아선상에서 벗어나게 해준 공로만큼은 인정해 줄 법한데 허 감독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러면 박정희에 대해 허 감독이 엄청난 증오심을 갖게 된 원인이 도대체 무얼까. 박정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악마적인 독재자가 즐비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박정희가 독재자였다는 사실이 허 감독의 그런 엄청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결국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가득 차 있는 저 싸구려 이데올로기가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데올로기는 진리도 아니고 사실도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자아 중심의 편견에 불과하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이데올로기의 노예이지만 고급스러운 이데올로기는 다 버려두고 하필이면 싸구려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는 건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허 감독은 '암살자(들)'을 속도감 있고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아마 오랫동안 고심했겠지만, 진리나 사실과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됨으로써 나와 내 집사람을 크게 실망시켰다. 멜로영화 감독 허진호와 정치영화 감독 허진호는 완전 딴 사람이었다. 전자의 허진호는 세상만사의 덧없음을 아는 허허로운 자유인이었던 반면, 후자의 허진호는 분명히 싸구려 이데올로기의 노예였다.

◇심오한 고급 멜로 영화로 돌아가자

내가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김기덕, 박찬욱, 봉준호 등의 감독들의 영화적 상상력에 대해 그다지 높은 평가를 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세상의 진실을 보려 하다가 그만두고는 자꾸만 싸구려 이데올로기에 무릎을 꿇으려 하기 때문이다. 한국 최고의 감독까지 싸구려 이데올로기에 몸을 파는 모습을 나는 정말 보고 싶지 않다.

"영화적 상상력" 운운하면서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전락한 자신을 변명하는 것은 참 비겁하다. 나와 같은 열렬한 팬을 위해 진지하게 반성하고, 예전의 그 허허로운 자유인 허진호로 돌아가 주기를 간곡하게 부탁한다. 정치판의 진실을 파헤치더라도 이데올로기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인의 눈으로 봐 주기 바란다. 특정 이데올로기에 따라 특정 정치인을 향해 근거도 없이 증오심을 불태우고 나면 허탈감 외에 무엇이 남겠는가.

예전처럼 남녀의 사랑을 다루는 멜로 영화로 되돌아가 수준을 더 높이는 것도 좋은 일 아닌가 싶다. 춘원 이광수를 예로 들고 싶다. 춘원의 소설 또한 대부분 멜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춘원은 멜로가 조선조 오백년 유교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로부터 개인들을 끌어내어 그 개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에는 춘향전 외에는 이렇다 할만한 멜로가 없었다.

춘원의 연애소설은 조선의 유교사회를 망치처럼 깨는 멜로였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유는 간섭받지 않고 뭐든 할 수 있는 개인의 힘이다. 유교사회의 가부장적 질서에서 벗어난 남녀 개인들은 서로 자유롭게 연애하며 식민지로부터의 독립과 근대화를 꿈꾸면서 애국계몽운동을 했다.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예술가

나는 20세기에 춘원의 연애소설이 전근대와 근대 사이에서 했던 그 역할을, 21세기에 허 감독의 멜로영화가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예술적으로 더 아름답고 철학적으로 더 심오하게, 수행해 주기를 기대한다. 세속적인 동시에 신성한 남녀의 사랑에는 한편으론 식욕 성욕 재산욕 명예욕 등 소유론적 욕망이 있고, 다른 한편으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존재론적 욕망이 있다.

내가 허 감독의 멜로영화를 좋아했던 것은 소녀 취향의 감상주의를 월등히 뛰어넘어 남녀의 사랑 속에 그 두 가지 상반된 욕망이 복잡미묘하게 얽혀 있음을 너무나 아름답게 영상화시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허 감독을 한국 최고의 감독이라 꼽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암살자(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솔직히 말해,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싸구려 이데올로기는 확 벗어던지고, 누군가에 대한 증오심은 잊고, '덕혜옹주'나 '암살자(들)' 같은 정치영화는 이제 그만하고, 예전의 그 순수한 허진호로 돌아가기 바란다. 그러려면 정치권력의 비호하에 싸구려 이데올로기에 아첨하는 영화로 막대한 돈을 긁어모으는 제작자와는 손을 끊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와 내 집사람과 같은 철학도가 오래전부터 허 감독의 팬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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