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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유입된 은과 광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유럽의 강자가 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지중해 등에서의 전쟁 비용을 감당하느라 국왕 펠리페 2세는 여러 차례 채무 지급을 중단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해상무역을 선도했던 포르투갈도 무역 수입에 비해 제국을 방어하는 비용이 커지고 경쟁국이 등장하면서 우위를 잃었다. 부의 유입이 국가의 영원한 지급 능력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반면 영국은 다른 길을 보여준다. 나폴레옹 전쟁 직후 국가부채는 국내총생산의 거의 두 배에 달했지만, 19세기 영국은 세계 패권을 확립했다.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의회가 과세와 재정을 통제하고 정부의 채무이행에 대한 신뢰를 높인 제도적 변화가 그 배경의 하나였다. 이후 두 차례 세계대전은 다시 막대한 재정 부담을 남겼고, 영국의 상대적 경제력도 약화됐다. 패권의 쇠퇴를 부채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재정적 여력이 국가의 선택지를 제한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미국 역시 전쟁 직후 높은 부채를 안고 패권을 확립했다. 달러의 국제적 지위와 깊은 국채 시장은 미국에 독특한 차입능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 특권도 무한하지는 않다. 미국 의회예산국은 올해 연방정부의 민간보유 부채가 GDP의 101%에서 2036년 120%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이자 비용이 늘면 국방·연구개발·사회안전망에 사용할 재정 여력은 그만큼 좁아진다.
이 역사에서 얻을 교훈은 '적자가 곧 쇠퇴'라는 단순한 공식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가 미래의 세입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게 전망하고, 지출의 우선순위를 적절히 조정하며, 경제적 충격을 감당할 수 있는가다. 1993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노스(North)와 그의 공저자 와인가스트(Weingast)는 17세기 영국의 명예혁명으로 인한 헌정질서 변화가 정부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게 하여 영국의 금융 발전에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재정의 지속가능성은 회계의 문제이기 전에 제도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를 비롯한 다수의 경제학자들이 반도체 호황에 기댄 확장 재정을 경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올해와 내년 세수가 좋다고 5년, 10년 지속할 지출을 결정해도 되느냐는 것이다. 반도체는 한국의 경쟁력이지만 경기변동이 큰 산업이다. 올해의 초과이윤이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세입의 일시적 증가를 영구적인 재정 능력으로 오인해서는 곤란하다.
이는 이미 경험한 위험이다. OECD는 2026년 한국경제보고서에서 2021~2022년 반도체 호황기의 세수 증가가 추가경정예산 등에 반영되었으나 2023~2024년 세입이 감소한 뒤에는 지출을 줄이기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세금을 더 걷을 때 지출을 늘리기는 쉽지만, 세수가 줄었다고 이미 지급하던 보조금과 복지급여를 없애기는 어렵다.
법경제학은 이 문제를 '공유자원 문제'로 설명한다. 특정 사업의 편익은 해당 지역과 수혜집단에 집중되지만, 비용은 전체 납세자와 미래 세대에 분산된다. 세수 호황기에는 부처와 정치권이 늘어난 재원을 차지하려는 유인이 강해진다. 한 번 형성된 수혜집단은 예산 축소에 저항한다. 현재의 정부가 얻는 정치적 편익과 미래의 정부가 부담할 재정비용이 분리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호황기에 과잉 지출을 선택하고 불황기에 증세나 차입으로 떠넘기는 유인구조가 생긴다.
물론 모든 확장 재정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경기침체의 충격을 완화하거나 미래 생산성을 높이는 인프라·인적자본 투자는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 재정건전성은 균형재정을 매년 강제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시적 충격에 대응할 재량은 확보하되, 일시적 세수로 상시적 의무를 만드는 일에는 더 엄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치적 유인을 통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재정준칙이다. IMF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122개 국가가 재정적자, 국가채무 등에 수량적 한도를 설정하는 재정준칙을 도입했다. 우리나라도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GDP의 3% 이내로 제한하고 국가채무비율이 60%를 초과하면 2% 이내로 더욱 엄격하게 관리하는 재정준칙의 법제화를 추진했지만, 아직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획일적인 수치가 모든 경제 상황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거시재정 전문가인 MIT의 블랑샤르 교수는 경직된 재정준칙 대신 국채금리와 경제성장률의 차이, 미래 재정수지 등을 고려해 국가채무의 지속가능성을 판단하는 '재정기준'을 제안했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수치를 기계적으로 준수하는 것보다 정부가 미래의 재정 부담을 충분히 고려하도록 만드는 제도적 규율이다. 이를 위해 독립적인 재정 평가와 중기 재정계획, 위기 시 예외 조항과 정상화 절차를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
제국의 역사를 보면 스페인의 은도, 영국의 해상무역도, 미국의 달러도 영원한 풍요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한국의 반도체 호황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호황기에 얼마를 벌었느냐만이 아니라, 호황이 끝난 뒤에도 감당할 수 있는 약속을 했느냐에 달려 있다.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정치적 선택이 아닌 제도적 책임으로 만들어야 하는 까닭이다.
지인엽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