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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의 리더십: 신보수주의의 챔피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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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8. 3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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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가 6년 만의 첫 만남인 1985년 11월에 있을 정상회담의 막바지 준비과정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로널드 레이건에게 우주무기의 완전한 금지를 전제로 ICBM의 50% 감축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 협상에서 고르바초프는 만일 미국이 우주의 군사화를 포기한다면, 자기는 모든 핵주기를 제로로 감축할 용의가 있다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슐츠는 소련인들이 SDI(전략방위계획)에 대해 얼마나 두려워하는 지를 이제 깨달았다. 그것은 그들이 어떻게 개발할지 모를 뿐만 아니라 개발할 여유가 없는 기술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사일 방어를 소련의 양보를 받아내는 중대한 흥정의 칩으로 간주했다. 아직 SDI가 성공적으로 발명되지는 않았지만 레이건은 SDI를 핵무기를 제거하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열쇠로 간주했다. 제네바에서 그들이 처음으로 만났을 때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에게 준비된 협상원고를 버리고 서로를 알게 되는 계기로 삼자고 제안했다. 레이건보다 20세나 젊은 고르바초프는 그가 들은 반-소련 농담들 중 어떤 것을 공유함으로써 레이건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오후 회담에서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에게 밖에서 산책하자고 제안했다.

일단 옥내로 들어오자 레이건은 종이 한 장을 꺼내어 그것을 고르바초프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모든 핵무기를 반으로 줄이고 유럽에서 중거리 미사일들의 제거를 제안했다. 고르바초프는 그것을 검토하고 수용할 만하다고 반응했다. 그러나 그는 우주의 무기에 대한 합의 없이 공세적 무기에 대한 제안을 진행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레이건이 미사일 방어를 핵심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고르바초프는 그것이 핵군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애물로 간주했다. 대통령의 반응은 소련과 기술을 공유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레이건 자신의 협상팀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 생각을 비웃었다. 다음 날 내내 두 사람은 헛되이 시간만 보냈다. 그의 합의된 지침서를 무시하고 레이건은 다음 해에 미국에 고르바초프의 첫 방문을 초청했고 고르바초프는 즉시 수락했다. 그리고 그 방문 후 레이건을 소련에 초청했고 레이건도 그 답방을 역시 수락했다. 고르바초프는 강인하고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했지만 그러나 거의 5년 만에 그는 대화할 소련지도자를 마침내 만났다고 레이건은 후에 기록했다. 고르바초프도 역시 대화를 계속할 상호염원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레이건을 "정치적 공룡"으로 간주했으며 레이건의 모순적인 언명을 종합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다음 해에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이 '공포의 균형'을 종식시킬 아이디어에 함께 사로잡히는 놀라운 전환이 발생했다. 1986년 1월, 고르바초프는 서기 2000년까지 모든 핵무기들을 제거하자고 제안하는 편지를 레이건에게 보냈다. 레이건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보좌진들에게 "왜 2000년까지 기다리는가?"라고 반응했다. 그의 보좌진들은 경악했다. 1986년 4월에 체르노빌(Chernobyl) 원자로에서 발생한 재앙적 사건은 고르바초프의 반핵 감정을 강화했으며 그가 합의에 더 의욕적으로 만들었다. 소련의 악화되는 경제적 상황도 역시 그랬다. 1986년 가을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를 증산할 계획을 발표했었다. 1986년 봄까지 국제 석유가격이 배럴당 230달러 이상에서 10달러 이하로 곤두박질쳤다. 석유수출로부터 들어오는 경화 없이 소련은 해외 빚을 갚으면서 군사적으로 유지하고, 또 곡식과 다른 기본적 상품들의 수입에 지불할 길이 없었다. 1986년 9월에 고르바초프는 레이건에게 여러 가지 일방적 양보를 제안하고 다음 해 계획된 미국의 방문에 앞서 회담을 제안하는 편지를 썼다. 슐츠 국무장관은 레이건 대통령에게 다음 달에 아이슬란드의 레이퀘빅(Raykjavik)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나도록 권유했다.

고르바초프는 우주무기의 개발속도를 늦추는 여부에 따라 중대한 군비축소 보따리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을 생각으로 레이퀘빅에 도착했다. 실제로 고르바초프의 제안은 본질적으로 레이건이 원래 제네바에서 제안했던 것이었다.
즉 소련 핵병기고의 핵심인 ICBM을 반으로 줄이고 유럽에서 중거리 미사일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얻기 위해 고르바초프는 우주에 기지를 두는 미사일 방어에 대한 제한된 연구를 ABM조약과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취급할 용의가 있었다. 미국은 오직 SDI 연구를 10년 동안 실험실에 국한하기로 합의만 하고 그 후 5년 동안 ABM 조약으로부터 철수하지 않기로 공약만 하면 되었다. 레이건은 요격용 미사일의 완전한 제거를 제안했고 고르바초프는 10년에 걸쳐 잠수함과 폭격기를 포함하여 모든 전략핵무기의 제거를 역(逆)제안했다. 결국 얼마나 오랫동안 별들의 전쟁 연구가 실험실에 국한될 것인가 하는 이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이견이 역사상 가장 포괄적인 군비통제 합의가 되었을 것을 막았다.

자기 자신의 최종입장을 알고 고르바초프의 최종입장을 간파한 레이건은 그들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 회담은 고르바초프가 SDI의 불안정화 효과를 여전히 외치고 있는 동안에 레이건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슐츠와 함께 회담장을 걸어 나갔을 때 끝이 나버렸다.

1986년 10월 레이퀘빅에서 철수하면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다 같이 굉장한 실망을 느꼈다. 고르바초프는 정치국으로 돌아가서 레이건을 계급의 적, 원시인, 그리고 동굴인이라고 비난했다. 슐츠는 합의가 실패한 책임을 고르바초프에게 돌렸다. 결코 개발되지 않은 기술이 고르바초프에게 그토록 무서운 전망이었다는 것은 터무니없어 보였다. 상상의 방어 무기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레이건의 절대적 거부의 입장이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미국과의 계속적 군사경쟁은 실행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 후 수개월 동안 고르바초프와 레이건 사이의 통신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1987년 봄, 두 지도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거래를 원했다.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가 기대를 높였지만 그러나 경제적 향상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러자 고르바초프는 현대화를 가속화하고 타협을 추구했다. 그는 수십명의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철수를 발표했다. 그는 또한 군비통제에 일방적 양보들을 발표했다. 핵실험에 모라토리엄을 걸고 공세적인 군사적 행동이나 팽창주의적 야심을 포기하는 새로운 독트린을 발표했다. 레이건의 투명한 의도가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평화에 대한 레이건의 염원을 진지하게 다루게 했다. 고르바초프는 중거리 미사일에 대한 조약의 조건으로 SDI 연구가 실험실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고집을 철회하면서 미사일 방어에 대한 레이건의 공약을 수용하려고 더욱 노력했다. 레이건도 1986년 이란-콘트라(Iran-Contra) 사건으로 실추된 자신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군비통제에 더 열심이었다.

레이건은 그해 봄에 베를린으로 여행하여 소련인들이 동서로 분할한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 앞에서 연설했다. "고르바초프 씨, 이 문을 여세요! 고르바초프 씨, 이 벽을 허무세요!"라고 천명하는 동안 소련의 개혁을 위한 이동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 말은 레이건 자신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문장들을 연설문에서 제거하라는 보좌진들의 압력에 저항했었다. 그 연설은 단지 탁월한 정치적 연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군비통제에 대한 그의 새로 발견된 열정에 관해 회의적인 우익들 사이에서 그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87년 9월에 체결된 중거리 핵무기에 대한 조약은 300마일에서 3400마일 사정거리의 모든 미사일, 즉 총 2611개에 달하는 미사일의 파괴를 요구했다. 닉슨이나 키신저와 같은 현실주의자들은 레이건이 임기의 마지막 해에 평화창조자로 보이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역사적 실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INF 조약은 상원에서 93대5로 비준되었다. 조약체결식은 1987년 12월 8일 오후 1시 45분에 고르바초프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이루어졌다. 공개적으로 고르바초프의 워싱턴 방문은 초강대국 관계의 전환을 이루었다. 고르바초프는 미국의 수도에서 자기 방식으로 매력을 보였고 미국인들은 그를 지구적 명사로서 영접했다.

1988년 5월 레이건은 모스크바에서 자기 임기 중 마지막 정상회담에서 소련의 내부를 마침내 볼 수 있었다. 군비통제의 의제가 남아 있지 않았기에 레이건은 미국 대사관저인 스파소 하우스(Spaso House)에서 열린 만찬에서 인권활동가들을 포함하여 거의 100여 명의 소련인들과 만났다. 그는 고르바초프에게 종교의 자유를 권리로 만들라고 요청했으며 베를린 장벽을 허물라는 자기의 요구를 되풀이했다. 레이건은 푸슈킨(Pushkin)을 인용하면서 "친구여, 시간이 되었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에서 레이건은 진행 중인 변화에 대해 대부분의 신용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고르바초프라고 말하면서 소련의 전환에 있어서 자기의 역할을 낮추었다. 두 지도자들이 붉은 광장을 걸어갈 때 한 기자가 레이건에게 그가 소련을 여전히 악의 제국으로 보느냐고 물었다. 레이건은 "나는 다른 시간, 다른 시대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1988년 말에 고르바초프가 유엔에서 연설하기 위해 미국을 다시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일방적인 50만 병력의 축소와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헝가리로부터 대부분 소련군의 철수를 발표했다. 그는 무기의 사용이나 위협이 더 이상 외교정책의 도구가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소련이 동유럽을 지배하에 두기 위해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로 해석되었다. 이 연설은 고르바초프의 진정성과 레이건이 그를 포용한 것을 입증했다. 그 후 레이건은 자유의 여신상을 배경으로 하고 그의 후임 대통령 당선자인 조지 부시(George H. W, Bush)를 대동하고 거버너스 아일랜드(Governors Island)에 있는 미국 해안경비대에서 고르바초프를 위한 오찬을 베풀었다.

1989년 1월 20일 조지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 후에 집으로 가기 위해 대통령 전용기에 오르면서 레이건은 "냉전은 끝났다"고 말했다. 그 후 1년도 안 되어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고 동유럽 국가들은 오랜 독재자들을 타도하고 그들의 독립을 주장했다. 1991년 말에 소련제국은 공식으로 끝이 났다.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레이건의 신용이 그로 하여금 INF 조약을 통과시키고 급진적 군비축소를 추구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만일 오직 리처드 닉슨만이 중국에 갈 수 있었다면, 오직 로널드 레이건만이 소련과 평화를 이룰 수 있었다. 2004년 6월 5일 레이건의 사망 소식에 그의 최대 적이었던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그는 올바른 순간에 평화의 창조자가 되기로 결정한 비범한 정치적 지도자였다"고 애정을 담아 추모했다. (끝)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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