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객석으로 들어서는 순간 코끝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가 극장을 가득 채웠다. 곱창 굽는 냄새였다. 무대 위에선 배우들이 연주하는 장구와 아코디언 소리가 흥겨웠다. 공연 시작 20분 전부터 펼쳐지는 프리쇼. 관객은 이미 1970년대 오사카의 한 곱창집 손님이 되어 있었다.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은 그렇게 관객을 용길이네 곱창집 안으로 초대한다. 재일한국인 2.5세인 정의신 연출이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자신의 유년시절을, 그리고 재일교포 사회의 아픔을 고스란히 녹여낸 이 작품은 2008년 초연 이후 14년 만에 한국 무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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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전쟁으로 왼팔을 잃고 아내마저 잃은 용길(이영석)은 재혼한 아내 영순(고수희), 전처의 두 딸과 영순이 데려온 딸,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과 함께 곱창집을 운영한다. 사고로 다리가 불편한 큰딸 시즈카, 다혈질 둘째 리카, 가수를 꿈꾸는 철없는 셋째 미카, 일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막내 토키오. 대학까지 나왔지만 재일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둘째 사위 테츠오까지.
무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오가며 이들의 일상을 따라간다. 차별과 빈곤 속에서도 꿋꿋하게, 때론 우스꽝스럽게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은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자아낸다. 정 연출이 실제 아버지에게서 들었다는 대사들-"한국에 가려고 짐도 다 쌌는데, 동생이 감기에 걸려 배를 못 탔다"-은 무대 위에서 생생한 증언이 된다.
야끼니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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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의 인터미션에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로비에서 두 악사의 연주가 펼쳐지고 있다. /사진=전혜원 기자
1부가 끝나고 15분간의 인터미션. 공연장 로비에서 두 악사의 연주가 펼쳐졌다. 장구 장단과 아코디언 선율이 어우러졌고, 관객들은 이들의 연주를 즐기며 사진을 찍거나, 돈을 넣어주기도 했다. 정 연출은 연극을 '제사'에 비유했다고 한다.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손님들과 나누듯, 공연 역시 배우와 관객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의식이라는 것. 프리쇼와 인터미션의 음악은 그래서 단순한 부가 장치가 아니라 작품의 본질적 일부였다.
극의 클라이막스는 조용히 찾아온다. 막내 토키오의 죽음이라는 비극이 닥치고, 재개발로 곱창집이 철거되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용길과 영순은 무대 위에서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본다. "이런 날이라면 내일을 믿을 수 있지. 설령 어제가 어떤 날이든지. 내일은 꼭 좋은 날이 올 거 같아." 처절한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내일을 낙관하는 용길의 대사는 큰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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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연극이 시작할 때 "이 동네가 정말로 싫었다"고 했던 토키오가 마지막에 울먹이면서 "사실은 이 동네를 사랑했다"고 말할 때 객석은 훌쩍이는 관객들로 가득 했다. 철거 직전의 곱창집을 내려다보는 토키오의 모습은, 고향을 떠나야 했던, 그리고 돌아갈 수 없는 모든 이들의 초상이었다.
한일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무겁다. 우리는 재일한국인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이주민에 대한 차별은 사라졌는가. 정 연출은 인터뷰에서 "정리하기 어려운 문제지만 열심히 고민하고 있다"고 답했다. 연극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질문을 던지고, 함께 기억하자고 말할 뿐이다. 공연은 2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