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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산업은 한 기업이나 한 국가 안에서 완결되지 않는다. 반도체와 데이터센터가 연산능력을 만들고, 클라우드와 인공지능 모델이 서비스를 개발하며, 앱마켓·검색·광고·OTT가 세계의 이용자와 연결한다. 콘텐츠, 제조, 금융, 유통까지 같은 가치사슬 위에서 움직인다. 국내 기업이 이 모든 층을 독자적으로 구축하려면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든다. 글로벌 빅테크의 자본과 기술, 연산자원, 유통망은 국내 기업이 세계 시장으로 나가는 데 필요한 보완 자산이 될 수 있다.
협력의 성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구글에 따르면 스타트업 캠퍼스가 지원한 국내 기업들은 지난 10년간 1조4000억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하고 5000명 이상을 직접 고용했다. 엔비디아와의 협력은 한국의 반도체·제조 역량을 세계 인공지능 공급망과 연결하고 있다. 해외 OTT의 투자와 유통망은 한국 콘텐츠를 세계 시장에 올려놓았다. 분야는 달라도 공통점은 분명하다. 빅테크의 기술과 시장이 국내 기업의 역량과 결합할 때 새로운 수요와 투자가 생긴다는 점이다.
물론 투자가 들어온다고 산업 발전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국내에 판매법인만 두고 핵심 연구개발과 데이터, 수익은 해외에 남는다면 파급효과는 제한적이다. 국내 기업이 값싼 공급자나 하청 개발사에 머물고 플랫폼 의존도만 높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해외 기업이 들어왔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투자와 협력의 조건을 제대로 설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에 가깝다. 빅테크의 국적을 탓하기 전에 우리 산업이 기술과 인력, 지식재산(IP)을 흡수하고 축적할 준비가 돼 있는지 물어야 한다.
정책도 규제와 유치라는 두 갈래에서 벗어나 '전략적 협력'을 설계해야 한다. 세제와 입지, 전력과 정책금융을 지원할 때 국내 연구개발, 대학·기업과의 공동연구, 스타트업 공동투자, 국내 인력 양성, 지역업체 조달을 성과와 연결할 수 있다. 콘텐츠 분야에서는 공동 IP와 흥행 연동 보상을, 클라우드·인공지능 분야에서는 국내 기업의 연산자원 접근을 협력 의제로 삼아야 한다. 국내 기업이 빅테크와 함께 해외에 진출하거나 현지 기술·유통기업에 투자하는 데에도 정책금융과 보증을 제공해야 한다. 지원금의 규모보다 국내 산업이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더 높은 위치로 이동했는지를 평가할 때다.
규제의 원칙도 분명해야 한다. 개인정보 보호, 공정경쟁, 소비자 보호, 창작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국내외 사업자에게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다만 국적이나 기업 규모만으로 부담을 더하기보다 실제 기능과 위험, 시장지배력에 따라 책임을 물어야 한다. 동시에 국내 기업에만 남아 있는 낡은 업종별 규제는 걷어내야 한다. 예측 가능한 규칙 안에서 글로벌 기업은 안심하고 투자하고, 국내 기업은 이들과 협력하거나 경쟁하며 해외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기술주권은 모든 기술을 국내에서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여러 기술과 사업자 가운데 선택할 수 있고, 필요할 때 협상하고 대체할 수 있는 역량을 갖는 것이 진정한 주권이다. 글로벌 빅테크는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영원한 우방도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밀어내야 할 적도 아니다. 우리가 핵심 역량과 협상력을 갖춘다면 이들은 자본과 기술, 세계 시장을 연결하는 강력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 문을 닫아 국내 시장의 크기만 지킬 것인지, 협력을 통해 국내 산업의 활동 무대를 세계로 넓힐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고립된 자립이 아니라, 우리 산업에 성과가 남는 개방형 협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