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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놀란 감독이 재구성한 오디세이아는 현대적 맥락에서 다뤄질 필요가 있다. 감독은 이를 위하여 두 가지 이상의 전략을 구상한다. 그 하나는 오디세우스의 귀환에 중심을 두고 그 이전과 이후를 하나의 서사에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 영화의 허구적 공간(Diegesis)의 내재적 요소와 영화 외적 요소를 하나의 연장선에 배치함으로써 전략적으로 픽션과 현실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하여 감독은 현대 우리가 직면한 세계적 정세와 그에 따른 암울한 미래를 대하는 자세에 관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전략은 바로 트로이 전쟁에 대한 기억의 문제와 연결되는데, 전쟁의 정점을 찍은 오디세우스의 계략, 즉 트로이목마에 대한 세 가지 기억의 층위다. 우선 영화가 시작되면서 지팡이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찍으며 박자를 맞춰, 음유시인이 일어서서 전설적인 트로이 영웅의 서사를 노래한다. 이는 신화의 차원으로 승화된 승리의 기억이다. 그다음으로 제시된 기억의 층위는 부친인 오디세우스의 생사를 알아내기 위해 텔레마코스가,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헬레네의 남편이자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를 찾아가서 직접 듣는 트로이 전쟁의 전말이다. 메넬라오스는 오디세우스가 얼마나 위대한 장수인지 그의 아들에게 구체적으로 영웅담을 전해준다. 마지막으로 트로이 전쟁에 대한 기억은 앞선 영웅신화나 무용담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오디세우스가 기억한 추악한 전쟁의 실체다. 자신이 기획한 트로이목마 작전을 수행하면서 적진에서 벌인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무차별적인 학살을 고백한다.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층위를 뒷받침하기 위해, 감독은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의 대사를 통해 환유 장치로서 영화적 대구법으로 제시한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손님을 환대하라는 '제우스의 법(크세니아)'과 '바다에서 온 사람들'은 절묘하게 뒤틀려 오디세우스에게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귀환길에 들른 섬들에서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은 '우리들은 약탈자인 바다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며 제우스의 법을 요청할 권리가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을 그렇게 여기는 이들은 없다. 침략자로 인식해 벌벌 떨며 도망치거나 아니면 막아내야 할 적에 불과하다.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을 맞이한 사람들은 딱 두 가지 부류인데, 엄청난 무력을 지녔거나 아니면 벌거벗은 노인과 연약한 여인들이다. 이제 그들의 역할은 거대한 힘 앞에 무력한 존재이거나 강간과 노략질을 일삼는 해적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문명인임을 자부했던 그리스인들은, 걸인의 행색을 하고 아내인 페넬로페 앞에 선 오디세우스의 입을 빌려, 자신들이 바다에서 온 약탈자였음을 자백하게 한다.
이어서 감독의 두 번째 전략은 영화 내적 캐릭터를 영화 외적 캐릭터와 연동시킨다는 데 있다. 앞서 이야기한 음유시인은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래퍼, 트래비스 스캇을 섭외했으며, 귀환의 모티브를 주로 수행한 맷 데이먼을 주인공 오디세우스 역할로 캐스팅했다. 다음으로 원작 '오디세이아'에는 없는 버려진 트로이목마를 지키는 '시논'이란 이름의 병사에 트랜스젠더 배우 엘리엇 페이지에게 역할을 맡겼다. 사실 시논이란 캐릭터는 원전에 없는 캐릭터로 감독은 그 모티브를 로마 시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가져왔다. 또한 헬레네를 흑인 배우로 그리고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흑인, 백인, 동양인까지 다양한 인종으로 구상했다. 조그만 섬 이타카가 국제도시도 아니고 사실상 불가능한 캐스팅을 감행한 것이다.
위와 같은 특별한 캐스팅을 통해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일견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의도했을 수도 있겠으나, 영화를 현대적 맥락에서 해석해 보면 그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감독은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일순간 무너진 미케네, 히타이트 청동기 문명을 소환하여 앞으로 닥칠 서구 문명의 붕괴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20세기에 이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뤄진 대부분의 전쟁은 서구가 그 중심에 있었다. 팍스 아메리카를 자랑하며 힘에 의한 세계 질서를 통제했던 미국은 그간 쉼 없이 오대양 육대주를 누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부적으론 이민 국가로서 다양한 인종과 민족을 수용함으로써 제우스의 법을 실천했으며, 외부적으론 세계 경찰로서 역할을 자부하며 타국에 크세니아의 환대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사실 자국의 철저한 이권을 위한 전쟁을 치러왔다. 안으로는 영화에서 시논이란 캐릭터로 은유되는 것처럼 소외된 계층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려야 했고, 밖으론 셀 수 없는 세계인들이 그 대가를 목숨으로 내놓아야 했다. 게다가 트럼프 이후 더 이상 이민자의 천국도 아니다.
이렇듯 영화는 문명의 붕괴 직전, 마지막 불꽃같던 트로이 전쟁에 대한 기억을 오디세우스의 귀환이라는 성찰적 정체성 찾기로 치환한다. 다시 말해서 현대 서구 문명의 종말을 미케네 청동기 문명의 종말로 대위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감독은 서구 기독교적인 직선적 역사관을 피하고, 짧은 역사를 가진 로마 건국의 정당성을, 오래전 트로이 문명의 부활에서 찾았던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원용함으로써 긴 호흡의 원형적 역사관에서 그 희망을 찾고 있다. 서구의 직선적 역사관은 그 결론이 종말에 있기에, 나의 몰락이 곧 세계의 멸망이다. 그러나 순환적 역사관은 닥쳐온 붕괴를 받아들인다. 이는 역설적으로 언젠가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다시 새로운 질서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영화에선 이를 은유적으로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와 함께 서쪽으로 떠난다는 설정으로 돼 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세상의 공멸을 바라지 않는다. 놀란 감독이 인터뷰를 통해 보여 준 구도자의 품격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기후 위기로 인한 재해가 끊임이 없다. 기원전 12세기 이후에도, 빈번한 전쟁과 급작스러운 기후의 변화로 거대 청동기 문명은 스스로 '바다에서 온 자들'을 만들었다. 문명이라는 질서 안에서 순응하며 살던 이들이 전쟁과 기아로 인해 야만으로 내몰리면 극단적인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한다. 그것은 약탈과 노략질이 삶의 일상을 차지하게 됨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괴물이 되는 것이다. 차세대를 선도할 대한민국이란 아름다운 문명이 전쟁에 가담하면 안 되는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붕괴의 기획에 포획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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