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죽을 고비 넘기며 쌓은 단단함… 한지에 담은 무욕의 세계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onelink.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520010009205

글자크기

닫기

전혜원 기자

승인 : 2024. 05. 19. 17:59

'미공개작 27점' 윤형근 화백 개인전
두번의 파리 체류 당시·전후 회화 소개
6·25 등 몸소 겪으며 생사 드나들기도
기백있으나 겸손한 인품 작품에 드러나
PKM갤러리서 다음달 29일까지 전시
한국 단색화 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윤형근(1928∼2007) 화백의 국내 미공개작 27점을 소개하는 '윤형근/파리/윤형근' 전시가 서울 종로구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작가가 2000년대에 제작한 대형 작품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은은한 베이지색의 리넨 바탕에, 언뜻 보면 블랙 같은 오묘한 색상이 세련된 조화를 이룬 작품들이다. 단순한 사각 기둥 형태의 나열 같기도 하지만 그 절묘한 비율과 품격 있는 정제된 형태에서 미학의 절정이 느껴진다.

윤 화백은 하늘을 상징하는 청색과 땅을 상징하는 다색을 섞어 천 혹은 한지 위에 스며들고 번지게 하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는 그의 작품에 관해 "굉장히 세련된 현대미술인 동시에 모든 것을 다 벗어던진 욕심 없는 작품세계"라며 "작가 본인이 삶 속에서 체험하며 쌓인 단단함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박 대표는 "윤 화백은 생사를 넘나드는 고초를 겪다 보니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다"면서 "전통 선비미학에서 봤을 때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서구미술 시각에서 봤을 때는 추상적이면서 미니멀하다"고 덧붙였다.

윤 화백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비롯해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를 몸소 겪으며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서울대 미대 재학 때는 국립 서울대 설립안 반대 시위를 하다 제적됐고 반공단체인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일도 있었다. 한국전쟁 때는 서울에서 부역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 복역했다. 1970년대 고등학교 교사 시절에도 부정입학 비리를 따지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끌려갔던 그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울분을 담아 쓰러진 검은 기둥을 그렸다. 국내 정세에 좌절한 그는 1980년 12월 결국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윤형근 화백의 생전 모습. /제공=PKM갤러리


1년 반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그는 캔버스 작업을 하지 않고 한지 작업에만 몰두했다. 이렇게 시작됐던 파리와의 인연은 2002년 또다시 이어졌다. 윤 화백은 한국을 방문했던 화상 장 브롤리가 제공한 파리 레지던시에 3개월간 머물면서 대형 회화들을 그렸고 이 작품들은 같은 해 가을 장 브롤리 갤러리에서 전시됐다.

이번 전시는 윤 화백의 생애 두 번에 걸친 파리 시기와 그 전후에 주목했다. 1980년대 파리 체류 당시에 몰두한 한지 작업, 2002년 장 브롤리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 그 전후 시기의 회화 등을 소개한다.

작업의 과정부터 결과까지, 작위와 기교가 배제된 그의 작업은 삶과 예술의 일치를 추구한 작가의 이념과 맞닿아 있다. 갤러리 관계자는 "기백 있으나 겸손하고 소박하지만 품위 있는 윤 화백의 인품이 그의 작업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며 "윤 화백은 늘 본인이 바로 서야 그림도 그렇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늘 본인의 의견을 드러낸 올곧은 분"이라고 얘기했다.

갤러리 2층으로 올라가면 윤 화백이 파리에서 가족과 찍은 사진, 지인에게 보낸 엽서, 파리에서 사용한 드로잉북 등 각종 자료도 만나볼 수 있다. 또한 2002년 장 브롤리 갤러리에서 전시 당시 제작된 영상을 통해 윤 화백의 생전 모습도 접할 수 있다. 영상 속에서 윤 화백은 이렇게 말한다. "품격 있는 사람이 점 하나 찍는 것과 품격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작품에는 그 사람의 품위가 나타납니다."

전시는 6월 29일까지.
전혜원 기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