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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원 기자

승인 : 2025. 09. 02. 13:41

리움, 설치미술가 이불 대규모 전시...1998년 이후 작품 150여점 망라
이불 "과거, 현재, 꿈꿨던 장면을 전시에 펼쳐냈다"
취약할 의향
이불의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 전시 전경. /삼성문화재단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전시장 입구에 발을 디디는 순간, 마치 다른 세계로 순간이동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머리 위로 거대한 은빛 비행선이 웅웅거리며 떠있고, 그 아래 검은 갑옷을 입은 전사가 묵묵히 서있다. 이것은 단순한 작품 감상이 아니라, 이불(61)이라는 예술가의 30년 세월을 관통하는 시공간 여행의 시작이다.

설치작가 이불의 대규모 서베이 전시 '이불: 1998년 이후'가 오는 4일부터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장 입구에 매달린 17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비행선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은 1937년 뉴저지 상공에서 폭발해 36명의 목숨을 앗아간 힌덴부르크호를 모티브로 했다. 인류가 꿈꾼 하늘을 나는 기술의 정점이자 동시에 그 파멸적 한계를 상징하는 이 작품은 전시 전체의 톤을 설정한다. 기술 진보에 대한 무한한 낙관과 그로 인한 파국이 공존하는 현대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이다.

《이불_1998년 이후》 전시 전경, 블랙박스
'이불: 1998년 이후' 전시가 열리고 있는 리움미술관 블랙박스 전경. /삼성문화재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블랙박스'라 불리는 2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검은 거울이 바닥과 벽을 뒤덮은 '태양의 도시 II' 위로 하얀 사이보그가 부유하듯 매달려 있다. 발걸음마다 거울 속에서 수십 개의 내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환상인지 경계가 모호해진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199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노래방 작업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I'이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거울볼이 설치된 이 공간에서 관람객은 직접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개인적 서사와 대중문화가 만나는 지점에서 이불은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7-1. 비아 네가티바, 2022 (2012년 작 재제작)
이불의 '비아 네가티바'. /삼성문화재단
가장 압도적인 경험은 지하 그라운드 갤러리의 '비아 네가티바'를 통과하는 순간이다. 유리와 거울로 만들어진 복잡한 미로 구조 속에서 관람객은 수없이 많은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어느 것이 진짜 나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은 마치 자아 탐구의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미로를 빠져나오면 작가의 30년 작업 궤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높은 천장의 벽면을 가득 채운 100여 점의 드로잉과 조각 습작들은 이불의 끊임없는 실험 정신을 보여준다. 작품 옆에 놓인 모형들을 통해 아이디어가 실제 작품으로 구현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평면 작업들도 놓칠 수 없다. '퍼듀'와 '무제(취약할 의향-벨벳)' 연작은 단순한 회화가 아니다. 안료에 자개와 돌가루를 섞어 층층이 쌓아 올린 후 표면을 갈아내는 독특한 기법으로,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과거라는 것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와 연관된다"는 작가의 말처럼, 전시장 곳곳에서 시간의 층위들이 중첩된다. 고대의 신화적 형상과 미래의 사이보그가, 폐허가 된 근대 건축물과 환상적인 우주 공간이 하나의 세계 안에 공존한다.

전시장에서 이불 작가 3, 리움미술관, 2025, 사진_윤형문
이불 작가. /삼성문화재단
한때 '여전사' '페미니즘 작가'라는 수식어로 불렸던 이불이지만, 이번 전시에서 만나는 그는 더 깊어진 철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이불은 "수식어는 사람들이 규정한 것이고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대해 "과거라는 것이 지나간 것, 잊힌 것이 아니라 현재와 연관 된다"며 "그래서 이것이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하고 우리가 꿈꿨던 것 같기도 한 장면들을 연출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중첩되는 시간의 층위를 탐구하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준다.

곽준영 리움미술관 전시기획실장은 "이불의 작품이 외국에서 더 많은 주목을 받았고 해외에서 전시를 하다 보니 한국에 못 들어온 작업이 너무 많았다"며 "작가를 바라보던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미술, 건축, 문학, 철학적 사유를 넘나드는 폭넓은 작품세계를 경험할 기회"라고 말했다.

이불 간담회 전혜원 기자
이불 작가가 1일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이불: 1998년 이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사진=전혜원 기자
이불 전시 전경 전혜원 기자
'이불: 1998년 이후' 전시 전경. /사진=전혜원 기자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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