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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를 지나며 사정은 달라졌다. 2003년 폭염을 경험한 유럽은 과거 '미국의 사치품' 정도로 여겼던 에어컨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자동차에 에어컨이 장착된 것도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에어컨에 관한 한 한국이 선진국이었다.
이제 유럽의 여름 풍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40도를 웃도는 극한 폭염이 매년 반복되면서 에어컨이 정치의 핵심 쟁점으로 급부상했다. 생존을 위협하는 더위 앞에서 '에어컨 사용권'을 둘러싼 이념 전쟁이 한창이다.
2027년 유력한 프랑스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보수 정당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의원은 "폭염으로 사람이 목숨을 잃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며 지난해 병원·요양원·학교 등에 에어컨 설치를 의무화할 것을 주장했다. 실제로 RN은 올해 6월 공공시설을 대상으로 5년간 100억 유로(약 16조4000억원)를 투입해 학교·병원·요양시설 등에 우선 냉방시설을 설치하고 이후 5년간 100억 유로를 추가한다는 내용의 의회 결의안을 내놓았다.
진보 정당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의 장뤼크 멜랑숑 대표는 에어컨 설치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라며 "모든 곳에 에어컨을 설치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프랑스 정부 역시 "대규모로 에어컨을 설치하면 기기에서 나오는 열기가 거리 온도를 올려 폭염을 악화시킬 수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이다.
독일에서는 녹색당은 부채를, 보수당은 에어컨을 사용한다는 내용의 풍자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지고 있다. 벨기에의 진보 성향 지방정부에서는 "최고의 에어컨은 나무다"라며 여전히 친환경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폭염이라는 기후 재난이 공중 보건 문제와 이념 갈등으로 번진 셈이다.
지난해 국제 의학 학술지 네이처 메디신(Nature Medicine)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유럽 32개국의 2024년 여름 고온 관련 사망자는 6만2775명에 달한다. 폭염이 심해질수록 '에어컨을 설치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누가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보수는 국민의 건강권을 앞세워 기후 정책을 공격할 수도 있고, 진보는 무분별한 냉방으로 인한 환경 파괴를 지적할 수 있다. 양쪽 모두 일정 부분 타당한 논리를 갖고 있다. 어느 쪽이든 국민이 원하는 것은 폭염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고 안전한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정책일 것이다.










